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육군이 공격용 헬기로 광주 시민들을 향해 공중사격을 감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공군 전투기에 폭탄을 장착하고, 해병대 1개 대대병력이 출동대기하는 등 광주민주화운동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해 3군 합동작전이 수행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이건리 변호사·특조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공중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가 있었다는 의혹 등과 관련해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조사결과를 7일 발표했다.
◇군사작전하듯 진행된 5·18 진압
특조위는 이번 조사보고서에서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계엄군 지휘부는 군사작전 명령을 하달하듯 현장 지휘관들에게 강경 진압작전을 독촉했다.
특조위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1980년 5월 21일 강경 진압작전을 계획하면서 다음 날 오전 8시30분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에 헬기사격이 포함된 작전계획을 하달했다. 지침에는 ‘무장폭도들에 대해 핵심점을 사격 소탕하라’ ‘위력시위사격을 하천과 임야, 산 등을 선정해 실시하라’와 같은 무시무시한 공격명령이 포함됐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또 헬기사격 시 ‘지금부터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개시한다’ ‘주민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 등의 경고방송을 할 것, ‘발칸 위협사격 실시로 양민 경고 분리 및 위압감과 공포감 효과를 달성하라’ 등의 구체적 지침을 하달했다. 황영시 당시 계엄사 부사령관은 5월 23일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전차와 무장헬기를 동원해 강경하게 충정작전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광주에 출동했던 헬기조종사들은 특조위 조사에서 “헬기에 무장을 한 상태로 광주 상공을 비행했다”고 털어놨다. 다만 이들은 “헬기 사격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고 특조위는 밝혔다.
특조위는 그러나 당시 목격자들과 전일빌딩 탄흔 등 여러 증거들을 토대로 헬기사격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내렸다. 특조위는 “전일빌딩 10층 내부에서 2016년 12월 13일 150개의 탄흔이 발견됐다”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탄흔이 UH-1H 헬기에 장착된 M60 기관총이나 개인화기 M16 사격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감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5월 22일 103항공대장 이모씨 등 조종사 4명은 코브라 헬기 2대에 발칸포 500발씩을 싣고 광주에 출동했다고 진술했다”고 부연했다.
◇헬기·전투기 등 공격자산 총동원해 광주시민 공격
계엄군이 5·18 당시 공중 헬기 사격을 비롯해 공군 전투기에 폭탄이 장착돼 출격 대기를 했다는 의혹도 사실로 드러났다.
특조위는 “육군은 광주에 출동한 40여대 헬기 중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5월 21일과 27일 광주시민을 상대로 여러차례 사격을 가했다”고 말했다. 특조위는 “헬기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 계엄군의 야만성과 잔학성,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라며 “특히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실시된 지상군 사격과 달리 헬기사격은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조위는 공군과 해군 역시 계엄군의 진압작전에 따라 전투병력을 이동시킨 정황을 확인했다. 특조위는 “공군은 수원 전투비행단 F-5 전투기들과 사천 훈련비행단 A-37 공격기에 각각 MK-82 폭탄을 이례적으로 장착한 사실이 인정됐다”며 “해군(해병대)은 해병대 1사단 3연대 33대대 병력을 광주 출동을 위해 마산에 대기시켰다가 계엄군의 진압작전 변경으로 해병대 추가 투입 실효성이 떨어져 출동 해제됐음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특조위는 다만 공군 전투기 등이 폭탄을 장착한 채 대기한 목적이 광주지역 폭격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특조위는 “5·18과 관련해 당시 공군 자료들이 거의 없고, 공군 지휘부 관계자들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며 “일부 관계자들은 조사에 응하지 않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고 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