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에서 (북한 대표단) 누구를 만나더라도 핵과 미사일 야욕을 포기하라는 나의 메시지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전략적 인내의 시기는 끝났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한국에 간다. 우리는 모든 옵션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힐 것이다.”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영구적으로 포기할 때까지 모든 경제·외교적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확신해도 좋다.”
“남북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은 압박해온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올림픽에 관한 회담일 뿐이며, 북한이 핵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할 때까지 압박 기조를 완화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최근 북한을 겨냥해 쏟아낸 이런 강경 발언은 모두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했다. 펜스 부통령은 평창올림픽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곧 한국에 온다. 현재 알래스카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미국 정부가 북한을 향해 메시지를 내놓는 ‘마이크’가 됐다. 아주 강경한 톤으로 편집된 그의 음성이 연일 미디어에 공개되고 있다. 그는 북한에 억류됐다 사망한 미 대학생 웜비어의 가족을 데리고 평창에 온다. 방한 중 천안함도 둘러볼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강경파 펜스 부통령이 이렇게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동안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한 축을 담당한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목소리를 잃었다. 북한을 향해 “만나자. 원한다면 대화 테이블이 원형인지 사각형인지를 논의해도 좋다. 무슨 얘기든 해보자”고 ‘무조건 대화’를 제안했던 트럼프 정부의 대표적 대북 협상론자는 현재 남미에 가 있다. 북한이 참가하는 평창올림픽을 코앞에 둔 시점에 그에게 맡겨진 일은 지구 반대편의 전혀 다른 이슈다.
◇ ‘말’ 쏟아내는 펜스… “한국 가는 이유는 아주 명료”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6일(현지시간) 알래스카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한국 방문 기간에 북한 정권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북한 대표단) 누구를 만나더라도 핵과 미사일 야욕을 포기하라는 나의 메시지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알래스카는 그가 평창에 오는 여정의 중간기착지다. 알래스카 군 기지를 둘러본 펜스 부통령은 “미사일 방어는 우리 국방의 핵심”이라며 미사일 공격에 대비해 지상배치형 요격미사일 20기를 추가로 배치하는 건 합당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이어 “솔직히 말해 올림픽에 가는 이유는 북한이 동계 올림픽이라는 강력한 상징성과 배경을 정권의 진실을 가리는 데 사용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어딜 가든 북한에 대한 진실을 알릴 것”이라고도 했다.
펜스 부통령은 “북한과 한국의 올림픽 단일팀과 협력이 북한정권의 실상을 가려서는 안 된다”며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돼야 하고, 도발을 끝내야 하며,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의 개발과 보유를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틸러슨의 짧은 한마디… “지켜보자”
미국 정부의 대표적 대북 협상론자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지난주부터 아르헨티나, 페루, 멕시코, 콜롬비아, 자메이카 등 중남미 5개국을 순방하고 있다. 베네수엘라를 향해 ‘원유 제재’를 경고하고, 중남미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는 중국을 견제하며 “중남미의 약탈자”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내놓고 있다.
그는 5일(현지시간) 페루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펜스 부통령이 평창올림픽 기간에 북한 측과 만날 기회가 있을 지에 대해선 ‘그냥 지켜보자’는 생각”이라고 한마디 했다. 만남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이 이어지자 “지켜보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되풀이해 답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틸러슨의 이 발언이 올림픽 중 북·미 접촉 가능성에 대해 미 정부 인사가 처음 내놓은 유화적 반응이라고 보도했다. 틸러슨 장관은 또 펜스 부통령이 북측으로부터 대화 제안을 받았는지 등을 묻는 질문에 “먼저 대화 제안에 착수하진 않을 것이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대화는 기본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틸러슨의 발언이 나온 뒤에 펜스 부통령도 북한 대표단과 만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항상 대화를 믿는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떤 만남도 요청하지 않았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보자”고 답했다. 그러면서 “누구를 만나든 내 메시지는 변함이 없다”고 덧붙여 강조했다.
결국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이 북한을 향해 내놓은 ‘긍정적 발언’은 틸러슨의 “지켜보자” 한마디뿐인 셈이다.
◇ 틸러슨의 ‘침묵’, 펜스의 ‘등장’… 세 가지 분석
남북 대화 국면이 조성되자마자 미국이 강경자세로 돌아선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분석된다. 우선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로 북·미 대화 가능성이 거론되자 미국 내 보수 세력이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북핵 협상을 염두에 둔 미 행정부의 전략적 포석이자 한국 정부의 대북 협상력을 키우기 위한 의도라는 관측도 나온다.
펜스 부통령은 방한 후 천안함 추모비를 참배할 예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최근 탈북자 8명과 간담회를 가졌고, 문재인 대통령과의 통화에선 북한 인권을 언급했다. 일련의 행동들은 국제사회의 북한 정권의 포악함을 알리고 반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청와대는 평창올림픽 기간 북·미 접촉을 타진했지만 미국은 사실상 이를 거절했다.
미국의 강경 자세는 일단 미국 내 보수 여론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6일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확정되면서 대북 대화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그동안 잠잠했던 미국 내 보수정치세력이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목소리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 대표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박사가 “트럼프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전략에 차이점이 없다”고 비판하는 등 미국 보수층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 비판 수위를 높이고 있다. 에드윈 퓰러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권 인수위원이었고, 클링너 박사는 차기 주한 미국대사로도 거론된다. 보수진영이 대북 접촉이 가시화되자 강경 대응을 주문했고,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 수용했다는 의미다.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샅바잡기’를 시작했다는 관측도 있다. 한·미 양국은 남북 대화가 본격화되면 북한의 핵동결·폐기 협상도 시도할 전망이다. 이를 앞두고 미국이 저자세로 나설 경우 협상력을 상실할 수 있다. 이 관계자는 “미국은 북한이 핵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가 없다면 평창올림픽은 1회성 행사에 끝날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대북 제재와 압박을 풀 수 없다는 강경한 메시지를 통해 북한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전략적 포석일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강경한 자세가 남북 대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해석도 나온다. 정부가 미국의 강경책을 지렛대 삼아 북한을 핵협상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방카 트럼프가 평창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키로 한 것도 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나타낸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우리는 평창올림픽 기간 중 북·미 접촉이 이뤄지길 희망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전방위적으로 미국을 설득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북한을 상대로는 추가 도발 시 판이 깨질 수 있음을 엄중히 경고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이 추가 도발을 감행한다면 모든 게 끝난다. 이전하고는 다른 위험한 상황으로 갈 수가 있다”며 “더 이상은 우리 정부도 인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