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노예, 그 후] 염전노예서 공장직원으로… “평범하게 일할 수 있어 행복

입력 2018-02-07 06:14
염전노예 사건 피해자였던 박형석(가명)씨가 지난달 11일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한 화학공장에서 부지런히 짐을 옮기며 일하고 있다. 박씨는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이후에도 국가의 무관심으로 빈털터리 생활을 하다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취업, 직장인으로 정착하는 중이다.

(상) 신안군 염전 사건 피해자

1년4개월 만에 지옥같은 섬 겨우 탈출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며 힘겨운 생활
국가 무관심 속에 민간단체가 재활 지원
직장 동료 “일 열심히 하고 매사 긍정적”

2014년 1월 28일 전남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4년이 지났지만 현대판 노예 피해자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민일보가 사회로 복귀한 피해자들을 직접 만났다.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이들은 새로운 삶을 찾고 있지만, 이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관심과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

“염전 일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죠. 그땐 하루 16시간 넘게 일했는걸요. 평범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요.”

4년 전까지만 해도 ‘염전노예 피해자’였던 박형석(가명·38)씨는 공장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회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지난달 11일 오전 6시쯤, 경기도 안산 자택에서 만났을 때 그는 출근 준비 중이었다.

회사 출근시간은 8시30분까지이지만 항상 오전 6시30분쯤 집을 나선다. 그는 “7시20분쯤에는 회사에 도착해 미리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일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출근은 동네친구이자 직장 선배인 김명남(64)씨와 카풀(승용차 함께 타기)을 한다. 김씨는 “이 친구와 친하게 지내다가 근처로 이사를 와 함께 출근하게 됐다”며 “매사 긍정적인데다 일도 열심히 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박씨는 안산 반월공단의 한 화학회사에 다닌다. 7시가 조금 넘어 회사에 도착한 그는 출근카드를 찍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휴게실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료 김덕호(65)씨는 “성격 좋고,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휴게실 청소도 자발적으로 한다”며 “젊은 사람 중에 이 정도로 열심히 사는 친구는 없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는 회사에서 화학약품 포대를 기계에 넣고 남은 포대와 주변을 정리하는 일을 한다. 근무시간은 오후 5시30분까지다. 오전 8시30분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1개에 25㎏인 화학약품 포대도 너끈히 들어올렸다. ‘무겁지 않으냐’고 묻자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가 1시간 동안 포대 40여개를 옮겼다. 점심시간에도 활력이 넘쳤다. 식사로 나온 스파게티를 식판 가득 담아 와서는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며 맛있게 먹었다.

염전에 묶여 있던 1년4개월

평범한 직장인으로 보이지만 박씨는 2012년 말부터 2014년 3월까지 전남 신안군의 한 염전에서 일했다. 그는 “천사의 섬이라 적혀 있지만 나에겐 지옥의 섬이었다”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말 괴롭다”고 했다.

박씨는 초등학교 다닐 때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누나는 돈을 벌기 위해 타 지역으로 떠났다.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자 그는 혼자 남았다. 23세 때부터 공사장과 사우나, 재활용 쓰레기 처리장 등 다양한 곳에서 일했다.

그 무렵 광주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한 남성을 만나 염전으로 가게 됐다. “좋은 일자리가 있다”며 박씨를 설득했다. 일자리가 시급했던 그는 남성을 따라 목포로 향했다.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2시간을 가 도착한 곳이 신안군의 섬이었다.

그에겐 5평 남짓한 방이 제공됐지만 침구류에 곰팡이가 펴 있을 만큼 더러웠다. 식사도 변변치 않았다. 맨밥만 주기도 했다. 주5일 40시간 등의 노동시간 개념도 없었다. 박씨는 새벽 2시에 일어나 염전에 바닷물을 들이는 일을 시작했다. 오전 7시 아침을 먹은 뒤엔 염전에서 거둔 소금을 포장했다. 소금 포장이 끝나면 염전주의 논과 밭 비닐하우스 등에서 농사일을 했다. 밤늦게야 일이 끝났다.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다 빼도 하루 평균 16∼17시간씩 일했다. 염전주는 종종 욕을 하며 몽둥이질을 했다. 뺨을 때린 적도 있다. 박씨가 손에 쥐는 돈은 한푼도 없었다.

세 차례에 걸쳐 도주를 시도했지만 섬은 감옥이었다. 첫 번째 도주는 마을 주민이 염전주에게 전화를 걸어 붙잡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도 때에는 인근 파출소로 도망쳤지만 경찰이 “이야기를 나눠보라”며 염전주를 데려왔다. 그렇게 1년4개월이 지났다. 박씨는 “옆집에서 일하던 친구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그곳에 있을 뻔했다”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탈출, 그 후에는

염전주는 처벌받지 않았다. 경찰 조사를 받던 염전주가 돌연 밀린 임금이라며 그에게 900만원을 현금으로 건넸기 때문이다. 그는 “돈이 한푼도 없던 형편이라 그것이라도 받을 수밖에 없었다”면서도 “그곳을 탈출한다는 것만 해도 기뻤다”고 했다.

언론에서 ‘염전노예’라며 박씨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당시 대통령이 경찰에 엄정 수사를 요청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가 사회로 복귀하도록 도와주는 공무원은 없었다. 오히려 잠자리와 밥을 제공받고 900만원까지 받았으니 돈 떼인 것 없다는 법 논리만 내세웠다.

애초 기대도 없었다. 정부도 법도 박씨에게 도움이 된 일은 없었다. 박씨는 염전주에게서 받은 900만원을 들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러다 한 공사장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박씨의 돈을 가지고 도망쳐 버렸다.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민간단체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지원한 돈으로 운영되는 쉼터에 들어갔다. 민간단체들은 그에게 2개월간 심리치료를 제공했고,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직업을 소개했다. 법률 상담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민간단체의 도움으로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염전노예 장애인 사건 재발 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그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피해자 8명의 사례를 묶어 “경찰과 고용노동부, 지방자치단체의 관리 소홀로 현대판 노예 사건이 일어났다”며 2억4000만원 상당의 정신적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소송에선 박씨만 이겼다. 재판부는 8명 중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도 외면당했던 박씨에게만 청구한 위자료를 모두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박씨가 새벽에 염전을 몰래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했는데 경찰관은 박씨를 보호하고 염전주의 위법한 행위를 조사하기는커녕 염전주를 파출소로 부르고 자리를 떠났다”고 했다. 생전 처음 법이 그의 편을 들어준 순간이었다. 박씨는 “소송에서 이겼을 때 감정이 막 북받쳐 올랐다”며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승소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박씨는 지난해 4월 경기도 안산에서 일자리까지 얻었다. 지금 사는 5평 남짓한 원룸도 자신의 이름으로 구했다. 예전에 헤어진 누나와도 연락이 닿아 다시 만났다. 어릴 적 친구들과도 다시 연락하게 됐고, 최근에는 여자친구도 생겼다.

박씨의 올해 목표는 운전면허증 따기다. 그는 “아직 운전면허증이 없는데, 한번 도전해볼 예정”이라고 했다.

안산=글·사진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