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선처” 탄원서 냈던 박근혜… ‘선처’에 오히려 궁지

입력 2018-02-06 07:40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8월 1심에서 경영권 승계를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 등이 대부분 인정돼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지 5개월여 만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선고 결과는 그와 함께 ‘국정농단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선고에도 직결된다. 박 전 대통령은 항소심 선고 전 이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에 이 부회장의 선처를 원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이 석방되면서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탄원처럼 선처가 이뤄진 셈이 됐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이 선처 때문에 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을 ‘정경유착’이 아닌 ‘최고 권력자의 뇌물 요구 사건’ ‘대통령이 기업을 겁박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이 부회장보다 박 전 대통령에게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판사 정형식)는 이날 오후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이 부회장에게 징역 2년6개월, 박상진 최지성 장충기 피고인에게 징역 2년, 황성수 피고인에게 징역 1년6개월을 각각 선고하면서 모두 집행을 유예했다. 이 부회장은 4년, 박상진 최지성 장충기 3년 등으로 집행유예 기간이 정해졌다. 이로써 이 부회장의 사실심(事實審)은 마무리됐다. 법률심인 대법원 상고 절차만 남아 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이 부회장의 선처를 원한다’는 탄원서를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고 한다. 자필로 쓴 A4 용지 4장 분량의 탄원서에는 이 부회장 경영권 승계 문제가 이 사건은 물론, 자신과도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특검의 ‘짜맞추기’라는 취지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이 부회장과 삼성 전·현직 임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내려진 판결이 박 전 대통령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게 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농단의 주역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이고 이들의 요구에 응한 이 부회장은 피해자의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모습은 이 사건에서 볼 수 없다”며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배경으로 뇌물을 요구한 ‘요구형 뇌물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이 부회장 측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 뇌물공여로 나아갔다”는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것이다.

재판부가 판단한 사건의 기본 성격이 달라지면서 1심의 유죄 판결 혐의들이 대거 무죄로 바뀌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36억원을 뇌물공여로 인정했다. 이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받은 뇌물이 된다. 89억원을 뇌물로 인정한 1심에 비해 대폭 줄어든 규모지만 2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를 강하게 질타했다. 재판부는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이 삼성 경영진을 겁박했다”며 “우리 법률은 수수자인 공무원에게 더욱 무겁게 책임을 묻고 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의 죄를 덜어주는 대신 박 전 대통령에게 훨씬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공여는 최대 징역 5년에 처해지지만 뇌물수수는 5억원 이상일 경우 최대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현재 롯데·SK·삼성에 592억원을 요구하거나 수수한 혐의로 기소돼있는 박 전 대통령의 경우 무기징역까지 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국정농단 재판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 등 항소심은 1심과 달리 박 전 대통령을 공범으로 적시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