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가 ‘가짜뉴스’에 속았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의 훈련 일화처럼 그럴싸하게 각색된 인터넷 게시물이 실제로 벌어진 일처럼 기사화됐고 방송 뉴스 앵커의 클로징 멘트로까지 사용됐다. 이 게시물을 적은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회원은 뒤늦게 다시 나타나 기자들을 비웃었다.
상황은 디시인사이드 해외축구 갤러리에서 시작됐다. 이 갤러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서도 활동량이 왕성한 곳이다. ‘해축갤’로도 불린다. 이 갤러리 게시판은 한국의 새벽시간에 열리는 유럽 프로축구를 함께 관전하며 잡답을 주고받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익명으로 아이피만 일부 공개한 회원 상당수가 이 게시판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곳의 한 회원은 지난 23일 밤 8시29분 ‘박항서 훈련 도중 베트남 선수 울린 일화’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적었다. 박 감독과 베트남 축구대표팀 선수 사진을 붙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문 시작) 훈련하다 선수들이 힘들어서 기어 다니자 박항서가 통역관이랑 선수들 다 집합시킴. “훈련 받는 태도가 왜들 그 모양이냐.” 그때 응 우옌 캉 하이가 손들고 이렇게 말했다고 함. “감독님 저흰 이런 훈련 받아 본 적 없고 너무 힘듭니다. 시합하기도 전에 다 쓰러질 거 같아요. 훈련량 좀 줄여주세요.”
박항서가 그 말 듣고 딱 한마디 함. “니들이 입고 있는 경기복, 신발, 먹고 마시는 어느 것 하나 너희 국민들의 피와 땀이 아닌 게 없다. 겨우 그 정도가 힘들어 편할 걸 찾으려면 축구 선수 하지말고 다른 걸 해라. 나도 즉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훈련을 게을리 한다는 것은 조국과 국민을 배신하는 것이다. 참가국 어느 하나 중 너희가 만만하게 볼 상대국이 있더냐? 힘들더라도 앞만 보고 뛰어라. 그래도 힘들면 가슴에 붙어있는 금성홍기(베트남 국기이름) 하나만 생각해라. 넘어지고 실패해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조국에게 보답하는 길은 훈련 뿐임을 명심해라”
박항서가 일침 놓으니까 쌀국(베트남) 선수들 눈물 콧물 흘렸다는 이야기. (전문 끝)
이 회원은 출처로 ‘hoi Bao Kinh Te 경제시보 17.11.25 기사’라고 적었다. ‘hoi Bao Kinh Te’는 경제시보란 뜻으로, 베트남에 실제로 존재하는 신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25일자에 박 감독에 대한 기사는 없었다. 축구 관련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매체 홈페이지는 매일 발행한 신문을 PDF 파일 형태로 제공한다. 이 파일을 통해 과거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일부 국내 인터넷매체는 다음날인 지난 24일 이 글을 그대로 옮겼다. 이때부터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 한 인터넷매체는 “훈련장에 박 감독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현실감을 더하기도 했다. 급기야 방송 뉴스 앵커가 이 내용을 클로징 멘트로 사용했다. 한 종합편성채널의 앵커와 아나운서는 지난 28일 이 가짜뉴스 내용을 소재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뉴스를 마쳤다.
(클로징 멘트 시작) 앵커: 베트남 축구 대표팀이 어제 준우승하면서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의 영웅이 됐습니다.
아나운서: 박 감독이 대회 출전 전에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면서요?
앵커: 그래서 주장이 이러다가 경기 전에 쓰러질 것 같다, 훈련량을 줄여달라고 했대요.
아나운서: 박 감독이 어떤 반응을 보였대요?
앵커: 이 정도 갖고 훈련 힘들다고 하면 (탁자를 탁 치며) 차라리 축구 선수 그만두라고 정신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취지였겠죠.
아나운서: 내일 월요일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한 주 맞이하세요. (클로징 멘트 끝)
박 감독이 지휘하는 베트남 23세 이하(U-23) 청소년대표팀은 지난 27일 중국 창저우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십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비록 준우승했지만 한국 일본도 모두 조기 탈락한 이 대회에서 사상 처음으로 결승까지 연전연승했다.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국민 영웅’으로 올라섰다. 박 감독의 성공담은 앵커의 클로징 멘트로 사용될 만한 소재였다. 문제는 ‘가짜뉴스’라는 점에 있었다.
‘가짜뉴스’를 처음 작성한 디시인사이드 해외축구갤러리 회원은 28일 오전 5시45분 게시판으로 나타나 ‘해축갤에 고백할 게 있다’는 제목의 게시물에 이렇게 적었다.
(전문 시작) 얼마 전에 박항서 훈련 눈물 일화 썰 기억하냐? 내가 그거 올렸는데 사실 그거 뻥(거짓말)이었어. 그냥 박문성(SBS 축구 해설위원)이 낚이나 안 낚이나 일부러 해축에서 퍼트렸는데 아주 운 좋게도 개념(추천을 많이 받은 글)을 감. 그리고 일주일 입 꾹 다물고 있었지. 근데 그 결과가 좀 재밌음. (전문 끝)
그러면서 자신의 글을 인용한 언론사 화면을 게시했다. “발로 뛰면서 써라”라고 적었다. 취재 과정을 생략한 보도 행태에 날린 일침이었다. 박 감독의 에이전트인 이동준 DJ매니지먼트 대표는 “대표팀이 소집된 시기는 지난해 12월이었다. 인터넷 글은 사실과 다르다”며 “하지만 박 감독이 평소 베트남 선수들에게 국가대표로서 선수가 느낄 무게감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박 감독이 자주 거론돼 축구팬이 상상력을 덧붙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