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화재] “퇴원하는 날이었는데”… 황망·비통의 눈물

입력 2018-01-27 08:04

장례식장 등 표정

“불타는 병실 안에서
2시간 이상 있었다니…” 통곡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96세 6촌 누나도 목숨 잃어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로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인근 윤병원 나노병원 제일병원 등에는 유가족과 부상자 가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시민들도 근처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에 비통해했다.

26일 오후 4시쯤 찾은 밀양 농협장례식장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사망자 일부의 시신이 안치돼 있었지만 간간이 울음소리만 흘러나왔다. 유족들은 대부분 비통한 표정으로 조용히 빈소를 지켰다. 소식을 듣고 급히 빈소를 찾은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2층에 시신이 안치된 고(故) 박연억(92·여)씨는 밀양 명성교회의 명예장로였다. 2층 객실 안내 전광판 앞에서 만난 명성교회 백기호 원로목사와 김용권 담임목사는 “교사 출신인 박 장로는 신실한 신앙으로 명망이 높았다”고 했다.

박씨는 지난해 쓸개에 혹이 생겨 병원을 찾았다. 최근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207호에서 3일간 안정을 취하며 이날로 예정된 퇴원만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김 목사는 “심방을 갔을 때 아들과 떨어져 홀로 살다 병실에서 다 같이 어울리니 즐겁다고 했었다”며 “오늘 오후 퇴원할 예정이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갑상샘암 검사를 마친 뒤 이날 오후 퇴원 예정이었던 이유기(89·여)씨도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현수금(91·여)씨 빈소 앞에서 만난 사위 이호기씨는 사고 소식을 인터넷 포털을 통해 접했다고 했다. 이씨는 “오전 8시30분쯤 화재 소식을 접한 뒤 아내와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한창 화재를 진압 중이었다”고 했다. 현씨는 지난 16일 허리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 3년간 허리협착증을 앓았던 터라 집중치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씨 부부가 오전 10시40분쯤 밀양병원 응급실에 누워있는 현씨를 발견했을 땐 심폐소생술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씨는 “20∼30분 전에 도착했다던데, 장모님은 2시간 이상을 불타는 병실 안에서 누워있던 셈”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밀양병원 장례식장도 슬픔에 빠졌다. 일부 유가족은 사망 소식을 수차례 확인한 뒤에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 보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6촌 누님인 박봉기(96)씨도 목숨을 잃었다. 박씨의 아들 손제득씨는 “밀양에 사는 친척으로부터 사고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달려왔다”며 “최근 상태가 호전돼 29일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고 했다. 박씨는 폐와 심장, 간 등의 기능 저하로 12월 중순쯤 밀양 세종병원 중환자실에 20여일간 입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가족은 구조 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밀양 세종병원 2층에서 사망한 책임간호사 김점자(51·여)씨의 막내동생인 김경식(42)씨는 오전 10시쯤 세종병원 응급실 맞은편인 노인회관에 누나가 담요로 쌓인 채 방치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누나를 발견한 뒤 병원으로 옮겨 30분간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사망했다”며 “방치하지 않았다면 살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졌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간호사는 환자를 대피시키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다른 동생 병수(45)씨는 “누나는 허리에 화상을 입었고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전했다.

2남3녀의 맏딸이던 김씨는 야간 전문대학에 다니며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최근에는 4년제 학사를 받아야겠다며 방송통신대에 다니고 있었다. 김씨 동생은 “누나가 불길 속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며 “‘불났다, 어쩌면 좋노’라고 말한 뒤 사이렌 소리 등 소음이 심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누나와 어머니의 통화는 고인의 유언이 됐다.

주민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병원에서는 시민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를 바라봤다. 일부 시민은 병원 앞을 찾아 애도를 표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밀양=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