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동계스포츠는 그리 인기 있는 편이 아니다. 쇼트트랙이나 스피드스케이팅 등 올림픽 메달권 종목을 제외하면 대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피겨 여왕’ 김연아 덕분에 관심이 높아진 피겨 스케이팅이 그나마 예외인 정도다. 한국이 거둔 동계올림픽 메달은 모두 이 세 종목에서 나왔다. 성적·인기가 높은 종목과 선수에게는 광고나 후원이 넘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별다른 지원이 없다. 이는 다시 성적과 인기에 반영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곤 했다.
아이스하키도 비인기 종목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 아이스하키는 남녀 불문, 변방 중의 변방에 있었다. 한국 남녀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는 데도 3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 ‘경쟁력이 크게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이 개최국 자동 출전권 부여를 미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IIHF는 대표팀에 ‘올림픽에서 강팀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정도의 경쟁력’을 단기간에 입증하도록 요구했다.
그런 아이스하키가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어떤 종목보다 관심의 대상이 됐다. 원인은 ‘이방인’이었다. 남자팀은 ‘푸른 눈의 귀화선수’들로 먼저 주목을 받았다. 여자팀은 최근 ‘남북한 단일팀’으로 이슈가 됐다.
◇낯선 이름들: 브락 라던스키, 마이클 스위프트, 맷 돌턴…
먼저 이슈가 된 건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이었다.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에는 낯선 이름들이 보인다. 브락 라던스키(캐나다), 맷 달튼(캐나다), 알렉스 플란트(캐나다), 에릭 리건(캐나다), 마이크 테스트위드(미국), 브라이언 영(캐나다), 마이클 스위프트(캐나다) 등이다. 모두 눈동자와 피부, 머리 색이 다른 귀화 선수들이다.
2008년 한국으로 온 라던스키는 2013년 ‘체육 분야 우수 인재’ 자격으로 특별 귀화를 허가 받았다.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단 귀화선수였다. 스위프트는 아시아리그 단일 시즌 최다 골, 최다 어시스트, 최다 포인트 기록을 모두 보유하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고연봉으로 유명한 스위스 1부리그(NLA)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한국에 머물고 싶다’며 거절했다. 대표팀 골키퍼(골리)인 돌턴은 믿기지 않는 선방을 펼치며 골문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선수 25명 중 23명이 세계 최고 리그인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출신인 캐나다와의 지난달 경기에서는 큰 점수 차의 패배가 예상됐지만, 돌턴의 선방으로 경기 막바지까지 한 점 차로 뒤지다 2대 4로 석패했다.
이처럼 귀화 선수들의 활약이 대표팀에 더해지면서 남자 대표팀은 지난해 4월 IIHF 세계선수권 월드챔피언십(1부 리그) 참가권 획득이란 쾌거를 이뤄내기도 했다. 20여년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4부 리그를 오갔고, 최근 10년간은 대부분 2~3부 리그에서 승격과 강등을 반복한 것에서 수직상승한 셈이다.
귀화선수와 토종선수 간 호흡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지만 전혀 문제가 없다. 오랜 시간 함께 뛰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친숙하다. 귀화 선수들은 자신의 의지로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선택했고 태극기를 달고 뛰고 있다.
◇비교적 맑음
남자팀을 둘러싼 분위기는 ‘비교적 맑음’이다. 일각에선 “돈으로 성적을 사려 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귀화 선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보다 긍정적이다. 한국은 귀화한 이들이 15만 명을 넘은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고, 2011년부터는 ‘체육 분야 우수 인재 특별 귀화’ 제도를 도입해 다양한 종목에서 귀화 선수들이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한 ‘낙후 종목의 저변 확대’도 동시에 기대할 수 있다.
성적에 대한 기대도 상승하고 있다. 백지선 남자 대표팀 감독은 “지기 위해 준비하는 거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며 “우리 목표는 금메달”이라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물론 12개 참가국 가운데 세계랭킹이 가장 낮은 한국(21위)에게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목표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이번 올림픽은 우리 안방에서 치러진다. 스포츠 경기에서 홈 어드밴티지가 주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선수와 관중 모두에게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또 남자 대표팀은 이미 ‘비빔밥 대표팀’으로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팀으로 각인되기도 했다. 여기에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가 평창 올림픽에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지만, 한국 대표팀 성적에는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뜨거운 논란, 차가운 시선
남자 대표팀에 비해 여자 대표팀의 상황은 훨씬 좋지 않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급하게 ‘남북한 단일팀’을 추진한 탓이다. 단일팀을 둘러싼 논란을 뜨거웠지만, 단일팀을 향한 시선을 차가웠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 의향을 내비치면서 이명박·박근혜정부에서 냉각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해빙됐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가 결정되는 등 때 아닌 봄바람이 부는 듯했다.
하지만 정부가 여자 아이스하키 종목의 남북한 단일팀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올림픽만 바라보고 땀을 흘린 한국 선수들의 출전 기회가 줄어든다는 비판이었다. 정부는 단일팀으로 인해 우리 선수들의 출전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해명했지만, 계획에 없던 북한 선수들이 함께 출전할 경우 우리 선수들의 출전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또 이 과정에서 여자 대표팀에 양해를 구하지 않았던 점, “메달권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이낙연 국무총리의 실언 등으로 여론은 더 악화됐다. 문재인정부의 주요 지지층인 20·30대에서도 남북한 단일팀 반대 여론이 80%를 웃돈다는 여론조사도 나왔다. 또 단일팀 논란 이후 문재인정부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처음으로 60% 이하로 떨어지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만큼 단일팀을 향한 시선이 좋지 않다는 방증이다.
경기력도 문제다. 2월 10일 열리는 스위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까지 불과 보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북한 선수들이 최대한 빨리 내려와 연습을 시작한다고 해도 서로 손발을 맞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더군다나 오랜 분단으로 인해 사용하는 용어가 다른 점도 걸림돌이다.
◇“우리는 해결책 찾을 것”
분명 나쁜 상황이다. 하지만 단일팀이 확정된 상황에서 이를 둘러싼 주요 행위자들은 각자 의연한 대처를 하고 있다. 정부는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양해를 구했다. 아이스하키 대표팀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녀 대표팀 총괄 디렉터이기도 한 백 감독은 남북 단일팀 문제에 대해 “남북 단일팀에 대해 정부와 우리 여자 선수들이 느끼는 것, 그리고 국민들이 바라보는 관점은 모두 다를 수 있다”면서도 “이슈가 무엇이든 우리는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러 머리 여자 대표팀 감독에 대해서는 “팀에 대한 지배력을 갖춘 매우 강한 여성”이라며 “단일팀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머리 감독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에 추천하기도 했다.
머리 감독은 22일 기자회견에서 “감독으로서 기분이 당연히 좋진 않다”면서도 “팀을 하나로 뭉치는 게 중요하다. 북한 선수들도 열심히 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측 선수들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훈련을 빨리 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지금은 나쁜 감정에 대해 피력할 시간도 없다. 얼마 안 남았는데 감정싸움으로 갈 건 아니다”고 덧붙였다.
분위기 반전의 가능성도 남아있다. “단일팀으로 인해 홍보가 많이 됐을 것”이라는 머리 감독의 말처럼 여자 하키팀을 향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한 팀으로서 좋은 성과를 내거나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할 경우 장기적으로는 남북 관계개선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문재인정부의 ‘평화 올림픽’ 구상에도 들어맞는다.
◇북한 선수단의 남한 입성
이런 가운데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과 관련 시설 점검을 위한 북측 선발대는 25일 남한에 도착했다.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팀 감독은 취재진의 질문에 “가서 합시다”라고만 말했다. 선수들도 말없이 짐을 옮긴 뒤 버스에 올라탔다. 북측 선수단은 남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의 훈련지인 충북 진천으로 이동했다. 첫 경기까지 보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 단일팀이 어떤 결과를 낼지 주목된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