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에서 단 1분이라도 뛰고 싶은 게 모든 선수의 꿈입니다. 이제 와서 단일팀 때문에 출전을 포기해야 한다면 좌절감이 클 것 같아요.”
한 빙상종목 선수는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 운동을 시작했다”며 이렇게 토로했다.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팀을 남북한 단일팀으로 구성한다는 정부의 결정에 반발이 심상치 않다. 1991년 축구와 탁구 단일팀을 응원했던 때와는 판이하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고, 젊은 세대의 가치관도 바뀌었다.
◇시민도 선수도 거센 반발
국가인권위원회는 17일 한 아이스하키 팬이 “남북 단일팀 구성이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수 23명의 행복추구권과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상대로 진정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진정서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면 국내 선수들의 출전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정부는 4년에 한 번 돌아오는 기회를 선수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고 한다.
실제로 체육계는 속으로 들끓고 있다. 동계종목 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단일팀 협의를 하자고 아이스하키협회에 제안한 적이 없다”며 “현장에서 밤낮 없이 4년간 땀 흘린 선수들을 본 사람이라면 단일팀 구성이 결코 쉽게 얘기할 사안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수에게 피해가 없을 것이란 정부 주장은 “올림픽을 20일 앞두고 밀어붙이면 고스란히 선수들에게 피해가 간다”고 일축했다. 다른 구기종목 관계자는 익명을 요구하며 “이러다 8월에 열리는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도 단일팀을 만들자는 것 아닌지 선수들이 불안해한다”고 전했다.
청와대 홈페이지도 단일팀 논란으로 뜨겁다.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360건 이상의 관련 글이 올라왔는데 대부분 반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데일리안이 16일 알앤써치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남녀 781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단일팀 결성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42.6%로 찬성 의견(44.1%)과 팽팽히 맞섰다.
◇평화보다 공평
알앤써치 설문조사에서도 30대의 단일팀 반대 비율이 50.0%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높았다.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젊은 세대는 한반도의 평화라는 거대한 명분보다 선수 개개인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장인 한모(31)씨는 “힘들게 준비해 겨우 올림픽에 출전하게 됐는데 북한이 무임승차하는 꼴 아니냐”며 “선수들은 억울해도 정치적 논리 때문에 단일팀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못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약속을 어긴 것이라는 비난까지 나온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의 입학 부정이 촛불집회를 촉발했던 것과 비슷한 정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선수들이 수년간 올림픽 출전을 위해 달려온 상황에서 정부가 남북 관계라는 명분을 내세워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을 추진한 것”이라며 “더 이상 스포츠를 정치적 도구로 보지 않고 스포츠 고유의 룰을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된 상황에서 국민들은 이를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1등이 아니면 이렇게 대우해도 되는지 국민이 선수를 대리해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통일보다 손익
북한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남북한 사이의 대화가 단절된 지도 10년 가까이 된다. 그 사이 북한에선 정권 3대 세습, 핵무기 개발 등이 진행됐다. 평양에서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수십만명씩 금강산과 개성을 오가던 기억은 젊은 세대에겐 희미하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통일이 국가적 과제로 여겨져 그 연장선에서 남북 단일팀이 호응을 얻었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북한을 같은 민족보다는 낡은 독재국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윤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젊은 세대는 남북통일이 손익계산서를 따져봤을 때 과연 우리에게 득이 될지 의문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이동훈 기획국장은 “남북 단일팀은 좋다고 보지만 급하게 준비하면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며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와 같은 방식은 나도 반대”라고 말했다.
◇남북, 평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합의
남북은 이날 판문점 남측 지역 평화의집에서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위한 차관급 실무회담을 열어 11개항의 공동보도문을 채택했다. 남북은 공동입장과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을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양측 국가올림픽위원회 간 협의를 진행키로 했다.
북측 대표단의 이동 경로도 확정됐다. 북측 민족올림픽위원회 대표단과 선수단, 응원단, 태권도 시범단, 선수단이 경의선 육로를 통해 우리 측 지역으로 들어온다. 응원단은 230여명, 태권도 시범단은 30여명 규모로 확정됐다. 평창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다음달 1일, 나머지 인원은 7일에 올 예정이다.
북측 대표단은 우리 측 안내와 질서를 따르며 남측은 북측 인원의 안전과 편의를 제공한다. 북측은 오는 25~27일 우리 측 시설 점검을 위한 선발대를 보내기로 했다. 북측은 평창 동계패럴림픽에도 150여명 규모의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응원단 활동도 보장된다.
남북은 평창올림픽 개막식 전에 북측 금강산 지역에서 합동 문화행사를 열기로 했다. 북측 마식령스키장에서 남북 스키선수 간 공동훈련도 진행한다. 이를 위해 우리 측은 오는 23~25일 금강산과 마식령스키장 현지 시설점검 등을 위해 선발대를 파견키로 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역점 사업인 마식령스키장에 우리 측 인원이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금강산 지역이 개방되는 것은 2015년 10월 이후 2년여 만이다.
남북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11시간 동안 10차례 접촉을 가진 끝에 합의를 도출했다. 남측에선 천해성 통일부 차관(수석대표)과 안문현 국무총리실 심의관, 김기홍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 기획사무차장이, 북측에선 전종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수석대표)과 원길우 체육성 부상, 김강국 조선중앙통신사 기자가 회담에 참석했다.
이형민 손재호 박구인 문동성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