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대전의 아파트단지에서 교통사고로 6세 딸을 잃은 소방관 부부가 인터넷에 올린 호소문이 급속히 확산되며 가해자 태도와 허술한 도로교통법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급기야 14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도로교통법 개정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소방관인 남편 A씨가 11일 공개한 호소문에는 교통사고로 딸을 잃게 된 경위와 가해자의 행태를 질타하는 내용이 담겼다. A씨의 아내와 딸은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를 건너다 갑자기 돌진해온 가해자 B씨의 차에 치었다. B씨는 사고 후 곧바로 멈췄다고 진술했지만 블랙박스 확인 결과 즉시 정지하지 않고 더 운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A씨 딸은 결국 사망했다.
“못봤다”는 B씨의 해명을 A씨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과속방지턱이 있고 사람도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A씨를 더 분노하게 한 건 B씨의 ‘뒤바뀐 태도’였다고 한다. 사고 후 가해자는 A씨 부부에게 “죄값을 달게 받겠다”고 거듭 사과하며 합의를 요구하다가 금고 2년이 구형되자 태도를 바꿨다는 것이다. 반면 B씨 측은 ‘충분한 합의’를 시도했다는 입장이다. 합의금으로 3000만원을 제시하기도 했다. A씨는 “액수를 떠나 돈으로 보상한다는 게 어처구니 없다”고 토로했다.
사건이 커진 데에는 도로교통법도 한몫 했다.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는 사유지로 도로교통법의 ‘12대 중과실’에 포함되지 않는다. 12대 중과실은 가해자가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도로교통법 상 12대 중과실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제한속도보다 20㎞과속 ▲앞지르기 방법 위반 ▲철길 건널목 통과방법 위반 ▲횡단보도 사고 ▲무면허 운전 ▲음주운전 ▲보도 침범 ▲승객 추락방지의무 위반 ▲어린이 보호구역 안전운전 의무 위반 ▲화물 고정 조치 위반
A씨는 가해자 측이 도로교통법의 허점을 이용한다며 14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을 올렸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생활해야 하는 아파트에서 사유지 횡단보도라는 이유로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똑같은 사건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티즌은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속히 개선해주세요. 부모는 하루하루 얼마나 고통받고 있을지 정말 안타깝네요” “사람을 죽게 했는데 어떻게 금고 2년이 나오죠? 아무리 법이 이상하더라도” “청원에 동의하고 왔어요. 마음 아파요” 등의 반응을 보였다.
◇ 피해자 A씨 호소문 전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OOO아파트 OOO동 주민입니다. 저와 집사람은 현재 대전에서 십여년간 시민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있어서 사실을 알려 드리고 도움을 받고자 이글을 올립니다.
2017.10.16일 19:10분경
다음날 소풍가는 딸 아이를 위해 집사람은 퇴근 후 아들과 딸과 함께 장을 보고 딸아이의 손을 잡고 우리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관리사무소 분수대 앞)에서 거의 다 건너가고 있던 중에 갑자기 돌진해오는 차를 피할 겨를도 없이 치여 둘 다 쓰러졌습니다. 블랙박스 확인결과 차가 바로 정지하지 않고 더 이동하여 딸 아이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바로 멈췄다고 하였으나 블랙박스 확인결과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거기는 도저히 사망사고가 날 수 없을 정도로 과속 방지턱과 사람들도 많이 다니는 횡단보도인데 어떻게 운전을 하였길래…. 단지 못 봤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6년 만에 힘겹게 얻은 소중하고 보석보다 귀한 딸을 잃고 집사람은 꼬리뼈가 부러진 중상임에도 사고 당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과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에 하루하루 죽지 못해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해자는 사고 며칠 후에 비행기를 타고 가족여행을 갈 정도로 상식선을 넘는 행동과 죄 값을 달게 받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최대한 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들로 저희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이에 가해자에게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고, 다시는 우리 아이와 같은 피해자가 아파트 내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주민여러분의 지지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사고 장소에 아이의 넋을 기리고자 꽃과 과자를 놓고 가는 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아이를 위해 추모제를 아이가 좋아했던 분수대에서 하고자 합니다.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추모를 해주시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