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에 /어지러이 함부로 가지 말지니 /오늘 아침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라’(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조선시대 임연 이양연이 지은 ‘야설(野雪)’이라는 시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서산대사의 글이라고 잘못 소개해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김구 선생은 이 시를 좌우명으로 삼고 일제강점기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꾸리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야설이라는 시가 널리 알려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눈 위에서 함부로 가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올바로 살아야된다는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은 변한 게 없다. 하지만 못된 짓을 저지른 절도범에게는 한낱 시행착오에 불과하다.
어지러이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가는 꼼짝없이 쇠고랑을 차게 되기 때문이다.
현금 2000만원을 훔치는 데 성공한 30대 절도범이 눈 위에 남긴 발자국을 추적해온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범행 직후 모텔에 5일 동안 숨어 ‘완전범죄’의 희열을 누리던 절도범은 경찰이 느닷없이 덮치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사전답사를 통해 범행을 저지른 철물점에는 CCTV가 분명히 없었고 현장에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철물점에 몰래 들어가 거액의 현금을 훔친 혐의(절도)로 서모(39)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6일 밝혔다.
서씨는 지난 11일 밤 8시45분쯤 광주 동구 한 철물점에 침입해 주인 박모(54·여)가 장판 밑에 숨겨둔 5만원권 400매를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씨가 슬쩍한 현금은 박씨가 다음달 유학을 떠날 아들의 유학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보관하던 것이었다.
박씨는 지난해부터 철물점 매출액 가운데 5만원권을 장판 밑에 따로 모아 뒀다. 공부를 하기 위해 출국하는 아들의 뒷바라지에 적잖은 현금이 필요해서다. 퇴근했다가 다음날 출근해 알토란같은 현금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광주동부경찰서를 찾아 한동안 울먹였다.
“아들의 유학자금이 없어졌어요. 누가 훔쳐간 것 같아요”
신고를 받은 경찰은 박씨의 철물점 담장 인근 눈 위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 점에 주목했다. 범행현장에 CCTV는 없었지만 밤새 내린 폭설 탓에 범인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광주지역에는 서씨의 범행을 전후한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대설경보 속에서 20㎝가 넘는 많은 눈이 내렸다. 결국 경찰은 서씨의 발자국을 차근차근 따라가 철물점에서 1㎞정도 떨어진 모텔에 혼자 숨어 지내던 서씨를 검거했다.
현금 1500만원은 서씨의 모텔 방에서 회수해 박씨에게 돌려줬다. 절도죄로 교도소에서 복역을 마치고 지난 2016년 2월 출소한 서씨는 그동안 특별한 직업 없이 생활해왔다. 훔친 돈 가운데 500만원은 유흥비 등으로 탕진한 것으로 파악됐다.
동부서 김판술 강력팀장은 “예상보다 많은 돈이 장판 밑에서 나오자 서씨가 빨리 달아날 생각만 하고 곧장 숙소로 돌아갔던 것 같다”며 “눈 위 발자국이 절도범 검거의 결정적 단서가 됐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
눈 위 발자국 함부로 남기지 마라. 절도범의 뒤늦은 후회
입력 2018-01-16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