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89세를 맞은 김시진씨. 북만주 독립운동기지로 알려진 취원창을 개척하여, 고문의 후유증으로 1969년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을 북만주에서 마을을 지켜온 독립운동가 김문로 선생의 장자다. 의병으로 청송의진에서 중군장으로 활약한 백하 김대락(1845~1914) 선생의 손자이기도 하다.
김문로 선생은 사비를 털어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여사에게 직접 군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남자현 여사는 지난 2015년 개봉해 1천2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맡았던 배역 ‘안옥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김문로 선생이 취원창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개척했을 때, 300여 세대의 한인 가구를 관리하고 독립 운동가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울 정도로 그의 집안은 유명한 대부호였다.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는 의사들의 가족들을 직접 부양하기도 했다.
조선 제일의 부호였던 집안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난 12월 추운 겨울, 김시진씨를 찾았을 때 그는 기초 수급비로 연명하고 있었다. 임대주택에 살며 수년전에는 폐휴지를 주워가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어 3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후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김시진씨의 조부 김대락 선생은 독립 자금이 모자랄 때마다 사람을 보내 안동의 고향땅을 팔았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털어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후손에게 풀 한 포기조차 남겨주지 못하게 되었다. 자식과 손자대에까지 이어지는 지독한 가난은 그렇게 시작됐다.
부친 김문로 선생은 중국 문화혁명 당시 친일파의 누명을 쓰게 되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결국 1969년 눈을 감기 전, “독립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싶었는데 고국 땅에 발길을 돌려보지 못해 한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현재 국가보훈처는 김문로 선생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 등이 당시에 기록한 공식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해 2017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르며 김시진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보다 중요한 국사는 없다”며 부친 김문로 선생이 국가유공자 지정과 서훈을 받도록 힘쓰겠다고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청산하지 못한 친일세력이 독재세력으로 이어지고 민주공화국을 숙주로 삼아왔다”며, “나라다운 나라라면 공동체를 배반하고 억압한 세력을 벌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자신은 물론 가족의 안위까지 버리고 수탈과 억압, 폭력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기리는 일은 나라다운 나라의 영광이다”라고 말하며, “더 늦기 전에 역사를 바로잡고 잊혀진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찾아내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시진씨에 따르면, 문 대통령의 방문으로 화제를 모으자 그제서야 수백번의 요청에도 외면해왔던 국가보훈처가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국가 보훈처는 조사 끝에 전화 한통을 통해 “김문로씨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인정하나, 입증할만한 문서 일부가 부족하여 유공자 처리는 못한다”라는 답변을 남기고 현재까지 감감무소식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시진씨를 그동안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라며 “한분 한분 독립 유공자 후손들을 찾아뵙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공교롭게도 당시 김시진씨 방문 시기가 문 대통령 방문 이후 였던 것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미 보훈처 내에서도 독립운동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갖고 있고 더 풍부한 자료 구성을 위해 노력도 하고 있지만,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후손 분들께 부탁을 드리고 있다. 독립 유공자 인정이 되지 않는 경우는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2018년 무술년 새해. 이 땅에 민주공화국(임시정부)이 건설 된지 99주년이 되는 해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해 3월, 대선 출마 발표를 앞두고 친일청산에 대해 100년을 넘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2일 오전, 문 대통령은 국립 현충원을 방문해 순국선열들에게 참배하는 것을 대통령으로서의 새 해 첫 일정을 시작했다.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로 인정 못 받아
김시진씨는 “이미 거의 목숨이 다한 마당에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며 “보상금은 필요 없으니 부친께서 국가로부터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문 대통령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고 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을 찾아봐준 유일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일 청와대 2018년 신년 인사회에도 초청 받았으나, 건강 문제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처럼 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독립 운동가는 1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나 유공자로 인정된건 단 1만 3천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대다수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런 예우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증조부 정용선 선생(1883~1928)의 유공자 인정을 위해 국가보훈처와 수십년간 투쟁을 벌이고 있는 정병기(62)씨는 독립투사들의 업적을 찾아내어 기리는 것이 국가보훈처의 마땅한 일이나, 오히려 후손들에게 증거를 찾아내어 갖고 오라 요구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보훈처가 목마른 그 후손들이 가져오는 자료에 의지하며 공훈심사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대부분의 공훈심사는 거증자료 부족이나 자료미비라는 명분으로 기각하거나 심사에서 탈락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독립유공자협회 관계자 역시 “전쟁으로 불타고 가난으로 없어진 서류를 어떻게 찾아오란거냐”며 “당연히 국가보훈처가 찾아야 할 것을 국민에게 떠넘긴다”고 분노를 토로했다. “자신이 독립운동 했다고 서류에 남기는 것도 아닌데 서류상 증거를 요구하는게 말이 되냐”라고 덧붙이며 그나마 극소수 남아있다하더라도 한국 전쟁 당시 대부분 사라졌다고 했다.
정황 증거가 확실해도 독립운동 활동을 거증할만한 명백한 서류가 없다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보훈처와 평생 싸워왔던 김시진씨는 최근엔 지병이던 뇌졸중이 악화되어 서울소재 병원에 입원 중에 있다.
송태화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