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행정의 키워드가 되다] 일이 쌓였는데 노동시간 단축 가능해?… 해보니 되네!

입력 2018-01-03 08:39
서울신용보증재단 조윤송 차장이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자신의 컴퓨터에 뜬 ‘PC 차단 시간 30분 전입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다. 이 재단은 지난해 1월부터 ‘월·수·금 PC오프제’를 시행하고 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제공

‘PC 차단 시간 30분 전입니다.’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서울신용보증재단 직원들 컴퓨터에 일제히 메시지가 떴다. 이 재단은 지난해 1월부터 ‘월·수·금 PC 오프제’를 시행하고 있다. 월·수·금요일 오후 6시에 사무실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 야근을 하려면 오후 5시30분까지 연장근무 신청 및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경영지원부 조윤송(38) 차장은 “평일 저녁엔 야근을 안 하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는데 PC 오프제 이후엔 적어도 주 3일은 6시에 퇴근한다”면서 “돌을 막 지난 아기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만족스럽다. 특히 집사람이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인과 영세자영업자들에게 신용 보증을 제공하는 서울신용보증재단은 서울시가 추진하는 노동시간 단축 시범사업장이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산하 기관인 서울신용보증재단과 서울의료원, 2곳을 대상으로 노동시간 단축 실험을 하고 있다.

서울시 용역 조사에 따르면 2016년 서울신용보증재단 직원들의 연간 평균노동시간은 2275시간이었다. 재단은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우선 야근 없애기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서 월·수·금 정시퇴근제와 야근 시간을 적립했다가 휴가나 반차로 쓸 수 있게 한 ‘노동시간저축계좌제’ 등을 새로 도입했고, 야근수당 절약분을 신규 인력 충원에 사용했다.

재단 노동조합에 따르면 1년 만에 평균노동시간은 2100시간 내외로 줄었다. 그러나 재단의 업무량을 평가하는 기준인 보증공급률은 노동시간 단축 전과 후 별 차이가 없다. 노동시간을 연 1800시간대로 줄이는 게 서울시와 재단의 목표다. 올해는 미사용연차수당과 연장근로수당을 모두 없애고, 기존 연장근로수당 일부를 고정급화하는 방안을 실험한다. 수당을 받으려고 휴가를 안 가거나 야근하는 관행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입사한 지 8년이 지났다는 조 차장은 “처음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노동시간을 줄이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의심하는 직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해보니까 되네!’하는 분위기”라면서 “야근수당이 줄면서 월수입이 수십만원 줄어들긴 했지만 대다수가 변화를 반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서울시는 올해 추가로 7개 산하기관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시작한다.

노동이 달라지면 삶이 바뀐다. 대다수 시민들의 삶은 노동에 묶여 있다.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노동이사제, 생활임금 등 서울시가 개척하고 있는 ‘노동행정’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난해 재단으로 전환된 120다산콜센터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는 모습. 120다산콜재단

서울시가 운영하는 민원상담전화 120다산콜센터에서 7년간 상담원으로 일해온 김소라(가명·33)씨의 삶도 변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5월 120다산콜재단을 설립하고 그동안 민간위탁업체 소속이던 다산콜 상담원 300여명의 고용을 전원 승계했다. 위탁업체 직원들을 전원 직고용한 국내 첫 사례였다.

정규직 전환 이후 뭐가 달라졌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급여는 크게 나아진 게 없지만 삶의 안정감을 찾았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위탁업체에서 일할 때는 몸이 아파서 쉬게 되면 일당을 차감했다. 그러나 지금은 연간 60일까지 유급으로 병가를 쓸 수 있게 됐다. 또 100만원대 초반의 낮은 기본급에 매월 평가를 통해 성과급을 따내야 했던 임금구조가 개편돼 성과급이 기본급에 편입되니 들쑥날쑥했던 급여가 안정됐다. 예전에는 1년을 일하나 10년을 일하나 기본급이 똑같았지만 이제는 해마다 호봉이 오른다. 가족수당이나 자녀학비 보조, 체력단련비 등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서울시는 2012년부터 시 산하 16개 투자·출연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시작해 2017년까지 9098명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고, 지난해부터는 무기계약직의 완전 정규직화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는 위탁업무의 직고용도 확대하고 있다. 120다산콜센터에 이어 올해는 주식회사 형태인 서울관광마케팅㈜도 재단화할 예정이다.

김씨는 “재단이 설립되고 나서 제일 먼저 상담원들이 쓰던 낡은 의자를 전면 교체했다. 감정노동자 보호 대책도 시작됐다”면서 “우리의 노동이 존중받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서울산업진흥원 노동이사로 선임된 강주현씨. 서울산업진흥원 제공

서울산업진흥원(SBA) 신직업교육팀에서 근무하는 팀장급 직원 강주현(44)씨는 지난해 3월 이사가 됐다. 서울시가 지난해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이후 서울연구원에 이어 두 번째로 뽑힌 ‘노동이사’다.

강씨는 노동이사 자격으로 지난해 모두 네 차례 이사회에 참석했다. 평소 서울산업진흥원의 정체성과 미래전략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던 강씨는 이사회를 통해 올해 미래전략TF팀 구성을 이끌어냈다.

서울산업진흥원 이사회는 서울시 상근직 이사 3명, 사외이사 4명, 대표이사, 노동이사, 이렇게 9명으로 구성된다. 강씨는 “사외이사들은 각 분야 전문가들이긴 하지만 외부 인사라서 회사 내부 사정을 잘 모른다는 한계가 있다”며 “회사 사정에 밝고 직원들이 투표로 선출한 노동이사가 이사회에 들어가서 직원들을 대표해 목소리를 내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 정부에서 많은 공공기관들이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에 동원됐다”며 “노동이사가 있었다면 적어도 그런 사업들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가 노동이사제를 시작할 때만 해도 경영에 혼란과 불안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이 많았다. 이에 대해서 강씨는 “지난 1년간 서울시 13개 기관에서 17명의 노동이사가 선임됐지만 어디에서도 노동이사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노동이사의 활동이 아직 이사회에 참석하는 수준에 불과해 노동자 경영 참여라는 상징적 의미에 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강씨는 국내에서 노동이사제가 막 시작되는 단계임을 강조하면서 “노동자 대표이자 경영진의 일부라는 노동이사의 위치가 앞으로 경영 감시나 노사갈등에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민 대다수가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노동문제는 그동안 행정의 대상이 못 됐다. 노동은 노사 문제로만 여겨졌고,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에 개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서울시만 해도 박원순 시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노동을 전담해서 다루는 부서가 따로 없었다. 노동 관련 업무라고는 노동정책팀에서 노조 설립 신고서를 받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점에서 박 시장은 노동을 행정의 영역으로 끌어안은 최초의 지방자치단체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박 시장은 취임 직후인 2012년 9월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노동정책과를 신설했고, 2016년 2월 일자리노동정책국으로 확대했다. 직원 3명에 5급 팀장이 담당하던 서울시 노동 업무는 일자리정책과, 노동정책과, 사회적경제과 등 3개 과를 거느린 국으로 커졌다. 현재 일자리노동정책국에는 직원 70여명이 근무하고 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