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적폐를 넘어] 제빵기사들 “본사 갑질·점주 을질 아프긴 마찬가지”

입력 2017-12-29 08:01

“쟤는 빵 만드는 기계야.” “본사에서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샌드위치 포장기계야.”

경기도 광주의 한 파리바게뜨 매장에서 일하는 제빵기사 A씨는 점주가 자신을 가리키며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점주는 대놓고 A씨에게 “기사는 뚱뚱하면 안 된다. 44사이즈나 55사이즈 입는 기사만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랜차이즈 제과점 제빵기사들은 A씨의 경험이 특별한 사례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주 사이에 끼어 양쪽에서 무시 받고 모욕당하기 일쑤다. 본사 앞에선 ‘을(乙)’의 입장인 가맹점주들도 제빵기사나 아르바이트생 같은 약자들 앞에선 ‘갑(甲)’으로 돌변하곤 한다. 제과점만의 문제는 아니다. 편의점이나 치킨·피자 매장 등 프랜차이즈 가맹점이라면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불법파견으로 논란이 된 파리바게뜨 제빵기사들도 ‘갑’인 본사, ‘을’인 가맹점주 사이에 낀 병(丙)과 같았다. 갑의 갑질도, 을의 을질도 아프긴 마찬가지다.

제빵기사 B씨는 “(임종을 앞둔) 할머니가 위중해 찾아뵙고 싶다”고 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점주는 그에게 “부모가 가면 되지 왜 너까지 바로 가야 하느냐”며 “너는 매장 일을 다 마치고 가라”고 말했다.

제빵기사는 대부분 여성이다. 결혼한 여성 제빵기사는 임신을 해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매장에 대체인력이 없는 데다 소속 협력사에서 “당분간 계속 일해 달라”고 하면 휴직을 하기가 힘들다. 임신 초기 쉬어야 할 때도 무리하게 일하다 유산하는 경우도 있다. 제빵기사 C씨는 “회사에 임신했다고 말했더니 ‘2년 뒤에 애를 갖는다더니 왜 지금 가졌느냐. 임신계획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말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여러 매장에 파견 가는 지원기사 D씨는 “화장실도 못 가고 점심도 못 먹을 만큼 바쁜 상황에서 서서 일하다보니 자궁질환을 얻게 됐다”고 털어놨다. 몸이 아파서 점심시간에 일하는 대신 일찍 퇴근하겠다고 요청해도 점주가 거부하면 어쩔 수 없었다.

본사의 갑질도 심각하다. 파리바게뜨 제빵기사 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도 불법파견 때문이었다. 제빵기사들은 본사인 파리크라상 소속도, 매장 직원도 아니다. 협력업체 직원이다. 그러나 본사는 카카오톡이나 전화로 제빵기사들에게 업무를 지시했고 파견비용을 지불하는 가맹점주도 현장에서 일을 시켰다.

제빵기사 E씨는 “제빵기사면 빵만 만들면 되는데 본사는 매장관리까지 시켰다”며 “카톡을 통해 야채와 케이크의 신선도, 제품 유통기한까지 수시로 보고해야 했다”고 밝혔다. 매장의 에어컨 청소 상태, 크리스마스 시즌 포스터 설치 현황까지도 보고해야 했다.

제빵업은 파견 허용 업종이 아니다. 본사나 가맹점주가 직접 업무를 지시하면 불법 파견이 된다. 고용노동부가 파리바게뜨에 제빵기사의 직접 고용을 지시한 것은 이 때문이다.

파리바게뜨 본사는 제빵기사의 인사에도 관여했다. 서울 강남구에서 지원기사로 일하고 있는 F씨는 지난해 5월 말 부당한 인사를 당할 뻔 했다. 본사 제조장(과장급)은 평소 바른말을 하는 F씨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자신이 관리하는 구역에서 빼라고 지시했다. F씨가 항의해 실제 다른 지역으로 전출되지는 않았지만 이 같은 사례는 종종 있다.

본사 임원이 매장을 순회하다 관리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빵기사를 해고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다. 그 기사는 당장 해고당하진 않았지만 본사 관리자들의 잦은 업무지시에 시달리다 한 달 만에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파리바게뜨 본사는 1년에 한 번씩 전국 5000여명 제빵기사들을 상대로 혁신경진대회를 연다. 여기에서 1등을 하면 본사 소속으로 전환되는 기회가 주어진다. 제빵기사 H씨는 과거 이 대회에서 1등을 했지만 전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본사는 앞으로 협력업체 직원의 본사 전환은 없다고 했지만 이듬해 대회부터 다시 전환이 이뤄졌다. 복수의 제빵기사들은 “본사가 경진대회를 통해 낮은 확률의 본사 전환 케이스를 만들고 협력사 직원들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