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도 소방관도 트라우마… 고통의 시간, 제천 화재 ‘그 후’

입력 2017-12-28 07:54
지난 21일 화재 현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뒤 제천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이상화(왼쪽)씨와 손자 재혁군이 멍한 표정으로 사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빨간색 글씨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네요.”

충북 제천의 노블 휘트니스 스파에서 화재사고가 발생한 지 27일로 엿새가 됐다. 하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생존자들 상당수는 아직 ‘화재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9명의 희생자들을 두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탓에 아픔을 쉽게 드러내지도 못한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낮에는 심장이 계속 두근거리는 증상이 이어져 일상생활 복귀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제천서울병원에서 기자와 만난 화재사고 생존자 이상화(69)씨는 “불이 난 후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창문을 뜯어내고 탈출했다”며 “아직도 불안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병실 TV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TV에서 붉은 글씨만 나와도 화재 당시 불길이 연상된다고 한다.

이씨는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아 억지로 잠들어도 2시간 정도면 저절로 깬다”며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만 사고 당시 공포는 씻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화재 당시 4층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이씨와 손자 재혁(15)군은 아래쪽으로 탈출하다 2층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한 채 불안에 떨고 있던 여성 15명을 발견했다. 화염이 심한 1층 출입구로 갈 수가 없어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체격이 좋은 재혁군이 나서 유리를 깬 뒤 창문을 뜯어내고 여성들과 함께 뛰어내려 화를 피했다.

화마와 사투를 벌였던 소방관들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화재현장에서 만난 소방관 A씨(38)는 “제천이 크지 않은 도시다 보니 소방서 직원 상당수가 희생자들과 인연이 있다”며 “구조를 기다렸던 분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침통해 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 다른 소방관 B씨(55)는 “대형사고 경험이 없어 현장 대응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며 “소방관들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께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대형 재난 후 트라우마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이제정(43)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사업과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트라우마는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에 대한 정상인들의 정상 반응”이라며 “다만 이로 인한 급성스트레스 반응이 생길 수 있는데 10∼20% 정도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과장은 “재난을 겪은 사람들의 말과 감정을 이해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트라우마는 병이 아니라 누구나 생길 수 있는 증상”이라고 강조했다.

제천시는 지난 22일 재난심리지원팀을 구성해 26일까지 유가족과 입원환자를 대상으로 병원과 장례식장 등에서 심리상담 안내와 진료를 했다. 심리 치료 130회, 정보제공 158회를 진행했다. 27일부터는 제천시정신건강복지센터가 유가족과 부상자를 대상으로 심층 심리진료와 치료에 들어갔다.

제천=글·사진 홍성헌 기자 ad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