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살려면 악역이 강해야 한다. 올 한 해 뜨거운 호평을 받은 SBS 드라마 세 편의 공통점 역시 악역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피고인’의 엄기준, ‘귓속말’의 권율, ‘언니는 살아있다’의 손여은이 바로 그 주역이다.
‘피고인’에서 엄기준은 1인 2역을 소화했다. 상반된 성격을 지닌 쌍둥이 형제 차선호와 차민호를 동시에 연기했다. 대사를 읊어내는 톤, 말과 말 사이의 숨소리, 미세한 얼굴 근육까지 달리 하며 완전히 차별화된 두 인물을 형성해냈다.
엄기준은 극 중 친형인 차선호를 살해한 뒤 형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동생 차민호를 주로 연기했다. 아이를 납치하고 의사와 형의 내연녀를 무자비하게 살해하는 등 상상 이상의 악행을 일삼는 잔혹한 사이코패스 캐릭터. 그로 인해 작품은 한층 쫄깃해졌다. 엄기준은 강렬한 카리스마로 지성과 팽팽하게 대립하며 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권율은 ‘귓속말’에서 냉철한 판단력과 차가운 카리스마를 지닌 엘리트 변호사 강정일 역을 맡아 입체적인 연기력을 선보였다. 다소 단선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캐릭터에 감정을 더해 개연성을 강화시킨 것 또한 그의 힘이었다.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지지를 받은 건 그런 이유에서일 테다.
권율은 극 초반 절제된 연기 톤으로 자신만의 캐릭터를 그려나갔다. 차분한 눈빛과 냉철한 보이스가 돋보였다. 때로는 고개 숙이지만 결코 발톱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서서히 날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극의 긴장감은 함께 고조됐다. 가족과 사랑, 우정을 모두 잃고 파멸해가는 후반부에는 분노 절규 광기 등 극한 감정을 폭발시켰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 속에서 권율은 흔들림 없는 무게감을 유지하며 선명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손여은은 ‘언니는 살아있다’을 통해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냉철하고 이기적인 재벌녀 구세경 역을 소화했다. 드라마틱한 캐릭터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극의 재미를 극대화했다.
극 중 구세경은 야망을 위해 공룡그룹의 비자금을 축적한 건 물론 불륜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 인물. 그런 구세경의 복합적인 감정선을 손여은은 차분하게 따라갔다. 특히 불륜남의 아내 김은향(오윤아)과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오윤아와의 ‘워맨스(워먼+로맨스)’가 빛났다는 평가를 얻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