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6일. 사업차 한국을 찾은 캐나다인 A씨(50)가 인천공항 화장실에서 쓰러졌습니다. 심장마비 증세였습니다. A씨는 가슴을 움켜쥐고 “도와달라(Help me)”고 수차례 외쳤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근처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발걸음을 멈추는 이는 없었습니다.
A씨의 숨이 꺼져가던 순간, 누군가 뛰어와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천공항 직원으로 보였습니다. 심장압박은 5분간 계속됐습니다. 천천히 A씨의 호흡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완전히 의식을 회복한 A씨는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성씨만 밝히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A씨의 아내 이해성(42)씨는 6년여가 지난 지금도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씨는 국민일보에 보낸 이메일에서 “남편은 생명의 은인이 누구인지, 어디서 근무하는지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워 인천공항공사 등에 수소문해 그분의 이름과 근무하는 곳을 알아냈다. 무엇이든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메일도 보내고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지만 답변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A씨는 수차례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상대방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인한 영웅으로 보였던 은인은 사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심폐소생술을 받았던 응급환자가 사망하자 그 가족들이 찾아와 ‘당신 때문에 우리 가족이 죽었다’며 따져 묻고 해당 직원을 경찰에 고발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는 뿌듯함보다는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고 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한 후 건강이 악화되거나 이후에 사망할 경우 자신에게 돌아오는 죄책감, 유가족들의 원망이 많이 두려웠다고요.”
A씨를 구한 B씨는 회사에서 실시하는 응급처치 교육으로 심폐소생술을 처음 배웠습니다. 공항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응급상황 대처법을 소개하는 TV프로그램도 챙겨봤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A씨를 마주하자 ‘응급처치 전문가도 아닌 내가 심폐소생술을 했다가 저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워낙 급박해 심폐소생술을 하긴 했지만 B씨의 마음은 내내 무거웠던 겁니다.
현행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일반인이나 의료인이 선의를 가지고 응급환자를 도울 때 재산상 손해나 상해가 발생해도 면책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다만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않고,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이 감면된다’고 명시하고 있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음’을 증명하지 못하거나, 환자가 사망할 경우 소송에 휘말릴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곤란해진다”는 인식이 팽배한 이유입니다.
의료인들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지난해 서울대 국제진료센터 임주원 교수가 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445명 중 ‘기내에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진료에 응하겠다’고 답한 의사는 60%대에 그쳤습니다. 임 교수는 “응급 콜에 응하겠다는 답변은 40~50대에서 55%, 60대 이상에서 80%를 기록해 연령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현행 국내 법률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수록 도움을 받을 확률이 매우 낮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발견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판단은 순식간에 일어납니다. 누군가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닐 겁니다. 다만 망설임 속에서도 남편의 목숨을 구해준 이의 선행을 알리고 싶었던 이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는 남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상황에서 그분이 제 남편의 목숨을 구해주었습니다. 제 남편은 그분으로 인해 ‘나는 새롭게 태어났고 한국은 나의 제2의 고향이 됐다’고 늘 되뇌이고 있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