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갑질 ‘대물림’… 인력수급·대형병원 문제서 비롯

입력 2017-12-22 07:36

A씨는 전공의 1년차 때 병원에서 나왔다. 일은 고됐고 해당 과 교수는 툭하면 때렸다. 그날도 교수에게 맞고 허겁지겁 회진을 하러 병실로 달려가는 길이었다. 문득 병원 창문을 바라봤다. ‘뛰어내리면 마음이 편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놀란 A씨는 그 길로 전공의 생활을 접었다.

의료현장의 전공의, 간호사는 A씨처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 하지만 관행화된 폭력이 상황을 더 가혹하게 만든다. 의료계 폭력에는 열악한 인력 여건, 대형병원 쏠림현상 같은 구조적 문제가 깔려 있다. 종합병원 교수들은 전공의를 지도하는 동시에 몰려드는 환자도 돌봐야 한다. 지위 유지를 위해 짬을 내 연구하고 논문도 작성해야 한다. 이 스트레스를 제대로 견디지 못하면 화풀이 대상은 권력 구조의 최하위에 있는 전공의에게 돌아간다.

이승우 대한전공의협의회 부회장은 21일 “교수는 전공의를 가르치는 교육보다 병원에 수익을 가져다줘야 하는 업무 등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면서 “전공의도 교육을 받기보다 잡무를 처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자신의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는 교수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전공의에게 이를 분출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해외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병상 수는 많은데 의사는 적은 기형적 구조다. 간호사도 마찬가지다. 간호사 1명이 환자 30∼40명을 맡으면서 3교대에 시달리다 결국 일을 그만둔다.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신규 간호사를 채용하면 남아있는 선배 간호사들에게 ‘신규 교육’이라는 가욋일이 생긴다. 빨리 부족한 인력분의 일을 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학습할 시간을 충분히 줄 여유가 없다. 가르치면서 폭언·폭행이 오가는 ‘태움’(간호사들 사이 괴롭힘을 뜻하는 은어) 문화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인력 수급 문제가 의료계 폭행의 원인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건강보험공단이 보전해주는 입원 수가가 원가의 75%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수익을 생각해야 하는 병원은 인력을 늘리려 하지 않는다”며 “적은 인력에 업무가 가중되면서 의료진도 예민해지고, 서로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력이 부족하니 병원은 전공의를 미래의 전문인력이 아닌 ‘값싼 노동력’으로 쓰게 된다. 적은 수의 전문의, 교수로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전공의에게 각종 잡무를 떠맡긴다. 그만큼 양질의 의료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훈련은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한 대형병원 전공의는 “교수의 잡무를 도맡아하는 전공의를 동료 의료인이 아니라 아랫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대병원 등 일부 의료기관에서 전공의, 간호사 등을 위한 인권센터를 마련하고 있지만 효과가 있을지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삼성서울병원은 폭력대응을 전담하는 부서도 따로 운영 중이다. 김진경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서울지부장은 “병원장이 인권센터를 관할하기 때문에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보호하는 데 그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