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개 머리카락으로 삶을 그린 광부화가 황재형

입력 2017-12-21 07:35
'둔덕고개’. 가나아트센터 제공

‘광부화가’로 불렸던 민중미술 1세대 작가 황재형(65)이 거듭났다.

전시장에 펼쳐 놓은 그림 속 대상은 평생 화폭에 옮겼던 강원도 태백의 광부들, 조국의 등허리 같은 산하, 허허로운 폐광촌이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숫돌에 벼린 칼처럼 선이 날카로워졌다. 그 날카로움에 베인 듯 풍경과 인물들이 더 아프게 날아와 박힌다.

무엇이 시각적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싶어 캔버스 가까이 가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다. 사용한 매체가 흔히 쓰는 유화 물감, 혹은 판화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전시 제목 그대로 ‘십만 개의 머리카락’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동서양 어느 작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창안이다. 머리카락이 선이 되고 면을 만들어내며 특유의 검은 톤을 통해 수묵의 번짐 효과까지 낸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신작을 선보인 황재형 작가. 가나아트센터 제공

지난 19일 ‘황재형 개인전-십 만개의 머리카락’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황 작가를 만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화 도구를 만졌으니 50년이 넘게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나랑 맞지 않아요. 먹처럼 스며들지 않고 여운도 없고 표면을 덮기만 하니….”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고민은 꾹꾹 가슴에 담아둔 숙제였다. 눈이 번쩍 뜨이는 계기가 왔다.

‘드러난 얼굴’. 가나아트센터 제공

1998년 경북 안동에서 고성 이씨 문묘를 이장하던 중 관 속에서 조선시대 묘주 이응태의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가 나온 것이다. 31세에 요절한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 엮은 일명 ‘원이 엄마 미투리’ 뉴스를 듣는 순간, 그는 무릎을 쳤다.

칠십에 황혼 이혼한 한 여성을 알게 된 것은 그를 더욱 이 매체로 몰아세웠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됐고, 또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는 그 여성은 첫 아이를 낳고 받아든 미역국에서 한움큼 머리카락을 건져내고 기겁을 했다. 며느리가 밉다며 시어머니가 넣은 것이다. 머리카락은 사랑의 징표이지만, 미움의 표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 작가는 “머리카락은 징표일 뿐 아니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현존체로 실재하는 것”이라며 “사적이면서도 그것이 품는 정신성으로 인해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도덕적 메시지까지 전달한다”고 말했다.

유화로 그린 광부를 작가가 ‘머리카락 버전’으로 새롭게 그린 ‘드러난 얼굴’을 보자. 동물성 머리카락이 그려낸 얼굴의 쭈글쭈글한 주름은 너무나 사실감이 있어 오싹해진다. 머리카락을 뭉쳐 만든 눈은 더욱 퀭하다. 그러면서도 태백의 백두대간 같은 풍경에선 지구의 굴곡 같은 깊은 맛을 내기도 한다.

작품 ‘삼배고두’는 최근 중국과 미국에 대한 외교의 굴욕적인 모양새가 조선시대 인조의 삼전도 굴욕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나온 작품이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처음엔 가족의 머리카락을 사용했지만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동네 미용실에서 얻어온다. 작업시간이 유화의 세 배나 걸린다. 눈에 충혈이 생기고 어깨는 굳어졌다. 속도의 시대에 거꾸로 느리게 가는 작업이다. “더디게 하다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여요. 풍경이든 사람이든. 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면 그렇잖아요. 앞으로도 계속할 거냐고요. 지금은 몰라요. 그때 가면 또 다른 게 나오겠지요.”

황 작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나왔다. 70년대 후반부터 작품 소재를 얻기 위해 강원도 탄광촌을 드나들다 80년대부터 태백에 눌러앉았다. 광부들과 그 주변 풍경을 소재로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내년 1월 28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