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공항서 승객들이 좀비처럼 어슬렁댔다

입력 2017-12-20 07:09
미국 애틀랜타 하츠필드-잭슨 공항 정전사태 이틀째인 18일(현지시간) 탑승객들이 공항 밖에까지 길게 늘어선 채 수속을 기다리고 있다.

하필이면 출장길에 미국 애틀랜타 하츠필드-잭슨 공항이 정전으로 문을 닫는 사고를 만났다. 암흑천지로 변한 공항터미널은 대혼란이었다. 일부 승객은 최장 6시간 동안 활주로에 멈춰 선 비행기 안에 갇혀 있었다. 수하물을 찾지 못한 승객들은 공항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성탄절을 앞두고 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많았다. 전력은 11시간 만에 복구됐지만 사고 이틀째인 18일(현지시간)에도 비행기가 부족해 운항중단 사태가 속출했다. 기자도 공항과 주변에서 추위에 떨며 15시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애틀랜타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17일 오후 8시40분쯤 애틀랜타 공항에서 렌터카를 반납할 때만 해도 아무런 낌새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렌터카센터 3층에서 터미널로 이어지는 트램(레일 전차)이 운행을 중단했다는 안내문을 읽는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터미널행 셔틀버스를 찾을 수 없었다.

우버를 불러 터미널로 가자고 하자 기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후 1시쯤 정전 사고가 발생했으며 테러리스트 소행이라는 의혹이 일어 긴급대피 소동까지 벌어졌는데 여태 모르고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으니 현장으로 가자고 했다.

전석운 워싱턴 특파원

경악했다. 하루 평균 27만5000명이 이용하는 애틀랜타 공항의 1층 델타항공 창구는 약탈당한 것처럼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항공사 전화는 불통이었다. 도로는 차량과 사람들로 엉켜 북새통이었다. 길바닥에 가방을 깔고 앉은 여행객이 수두룩했다.

작업복 차림의 인부에게 물어보니 “자정까지는 전력이 복구될 것 같지만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동차 불빛을 뒤로하고 컴컴한 터미널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걸어서 2층 로비로 올라갔다. 미국의 인기드라마 ‘워킹데드’의 기괴한 장면이 떠올랐다. 좀비들의 습격을 피해 생존 투쟁을 벌이는 워킹데드의 등장인물들처럼 거대한 터미널 구석구석에 여행객들이 많게는 수백명씩 웅크리고 있었다. 수하물을 찾지 못한 승객들은 컨베이어벨트 위에 드러누웠고, 불 꺼진 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전등을 들고 지나가는 보안요원들은 좀비마냥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불빛이 환한 곳으로 가니 여행사 직원들이 물과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노트북 컴퓨터에 연결해 충전하느라 두 손이 모두 자유롭지 않았지만 물을 한 병 받아들었다. 그 사이 밤 12시51분으로 비행기 시간이 다시 늦춰졌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그 문자를 보여주자 항공사 직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장들과 승무원들도 모두 숙소로 갔어요. 아침까지 정상운행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자정이 지나자 끝내 ‘운항 취소’ 문자가 날아왔다. 공항에서 더 버틸 이유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20분 거리의 허름한 숙소에서 눈을 붙인 뒤 다시 공항으로 나왔다.

빛을 되찾은 공항터미널 안은 환했지만 혼란은 여전했다. 공항 바닥에는 노숙인처럼 드러누운 사람들이 즐비했고, 항공사 직원들은 카트를 밀고 다니며 햄버거와 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재난대피소 현장을 방불케 했다. 창구마다 줄지은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대기행렬을 따라 걸었다. 문자메시지로 QR코드 탑승권이 날아왔다. 보안 검색을 마치고 탑승구까지 가는 데만 2시간이 더 걸렸다. 오후 3시에 출발하는 비행기 탑승자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뒤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수험생처럼 초조했다. 비행기 문이 닫히기 5분 전에 좌석을 배정받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애틀랜타 공항은 17일 1100여대의 여객기 운항을 취소한 데 이어 18일도 400여대의 운항을 취소했다. 변전소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예비 전력시스템까지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에 안소니 폭스 전 미국 교통부 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고”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 역시 애틀랜타에서 발이 묶였었다.

글·사진=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