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수(70)씨는 3세 때 부친 김종득씨와 헤어졌다. 1950년 6·25전쟁으로 떠난 피란길에서였다. 부친은 당시 수원농대(현 서울대 농대)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임신한 엄마에게 봉수씨를 데리고 충남 온양 친정에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행방불명됐다.
지난 1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봉수씨는 “휴전 뒤 어머니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서울 구석구석을 3년간 돌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고 했다. 전남에 있던 친가도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져 소식이 끊겼다.
봉수씨는 아버지 없이 외가에서 자랐다.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외가에서 반대한 결혼을 한 탓이었다. 초등학교는 외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몰래 들어갔지만 졸업은 못했다. 16세 되던 해에야 큰아버지를 만나 그 집 아들로 이름을 올렸다. 공부를 하기엔 이미 늦은 나이였다. 봉수씨는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했다.
그가 아버지의 납북 사실을 알게 된 건 27세 무렵이었다. 북한군에 끌려가다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친척은 아버지가 형과 함께 납북됐다고 전했다. 그제야 사촌동생도 비밀을 털어놨다. 명문 중고교를 나왔는데도 한국해양대에 지원했다 면접에서 떨어진 동생은 “면접관이 ‘신원조회를 했더니 네 삼촌이 북한에 있다. 그래서 널 뽑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말로만 듣던 ‘연좌제’였다.
봉수씨도 29세 때 중동의 카타르 파견 근로자로 뽑혔지만 여권을 발급 받지 못했다. 담당 공무원은 “사상 검증이 안 돼 여권을 발급할 수 없다”고 했다. 다른 공무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해외 파견 근무를 나가긴 했다.
경찰은 항상 봉수씨 가정을 감시했다. 때때로 “어디 갔다 왔나” “뭐 하고 있나” 확인했다. 몰래 담을 넘어와 집안을 들여다본 적도 있다.
아버지가 자발적 월북자가 아니라 납북자라는 사실은 지난 4월에야 인정받았다. 봉수씨는 1990년쯤 아버지 호적으로 옮겼고 지난 4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정부에 납북자로 신고했다. 정부는 봉수씨의 부친을 납북자로 인정했다. 2010년 제정된 ‘6·25전쟁 납북 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 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에 따른 조치였다. 이 법에 의해 출범한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그동안 4782명을 납북자로 인정했다.
김규호 선민네트워크 대표는 “이들 중에는 가족 중 한 명이 북한에 끌려갔다는 이유로 공무원이 되지도, 해외에 나가지도 못한 이들이 많다”고 했다.
납북자 가족들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는 국회가 보상지원법을 제정해 실질적인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봉수씨는 “오랜 세월 연좌제로 고통 받았는데 정부는 진심어린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6·25 전쟁 후 납북된 어부 가족에겐 수천만원의 보상과 각종 보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면서 “전쟁 때 납북당한 이들의 가족은 오랜 세월 불이익을 받았는데도 단돈 1원도 보상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된다. 정부는 보상과 지원 대책을 즉각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