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위로] 내 상처, 이웃 섬김의 힘 되다

입력 2017-12-15 13:59
예수를 믿는다고 생의 고통이 면제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달아날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는 것 같다. 이런 감정의 늪에 빠질 때 히브리 단어 ‘헤세드’를 떠올린다. 이 단어는 영어성경(NIV) 시편 13편에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번역된다. 주님의 확고한 언약적 사랑과 백성을 향한 주님의 위로를 의미한다. 변함없는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이웃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변함 없는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지난 13년 동안 소아암 환우와 가족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쏟아온 배길선(63·한빛사랑하우스 관리위원) 권사는 ‘상처 입은 위로자’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타인을 섬기는 사랑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고후 1:4~5)

상처 입은 위로자
“자녀가 몇 명이세요?” 배 권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질문이다. 두 명이라고 말해야 할지 세 명이라고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들만 셋이었다. 그중 종수는 든든한 맏아들이었다.

1996년 10월, 고등학교 3학년이던 종수가 허리통증을 호소했다. 병원에선 ‘다발성 전이 암’이라고 진단했다. 암 세포가 이미 간과 신장까지 퍼져서 치료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아들은 “엄마, 저 어떻게 해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나요?”라며 통곡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리고 싶었지만, 진단 받은 지 2개월 만에 아들은 하늘나라로 떠났다. 세상에 어둠만 가득했다. 동네 마트에조차 가지 않고 몇 달 동안 집 안에 갇혀 살았다.

멍하니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때 비슷한 처치의 엄마들 모임에서 병원 봉사활동을 권유받았다. 불현듯 암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겁만 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용기를 내 자신의 경험을 다른 환아 부모들에게 전해주고 자신과 같은 후회를 막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자녀를 잃은 엄마들 중에는 아이 생각이 나서 아이가 입원했던 병원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1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1시간이나 돌아서 가는 사람도 있어요. 반면 저처럼 아이와 함께 했던 기억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병원에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러나 저도 병원봉사를 시작할 때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었어요.”

그가 처음 찬양봉사를 간 곳은 아들이 불과 1년 전에 입원했던 신촌세브란스 병원의 병실이었다. 투병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13년 동안 소아암 환아와 가족들을 위로해 온 배길선 권사가 한빛사랑하우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신현가 인턴기자

“울음을 삼키느라 찬양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찬양 후 마음이 편했어요.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넘쳤어요. 그렇게 98년에 시작한 화요찬양봉사는 남편과 함께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어요.”

매주 화요찬양봉사로 시작한 병원봉사는 신촌세브란스 소아암 백혈병 병동 봉사, 세브란스 어린이 병원학교 봉사로 이어졌다. 매주 매달 철이 바뀌어도 그들 곁을 지켰다. 그렇게 아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해줬다.

“아이가 항암치료를 받으면 토하고 마르기 일쑤가 되는데 이를 지켜보는 부모는 말 그대로 피눈물이 나고 애가 타들어 가요. 병원에 안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애써 차린 밥을 몇 술 뜨지도 않고 온종일 실랑이를 하다 결국엔 맘에 없는 말을 내뱉고 후회하고 가슴아파하는 누구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들의 곁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그는 환자 가족들에게 어떤 것이 위로가 되고 상처가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아들이 투병 중일 때 어떤 사람은 병문안 와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길래 그래” “십일조 도둑질 한 거 아니야”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연단이 많아” 등등의 말로 상처를 줬다. 오히려 두 손을 꼭 잡아주며 “힘내 내가 기도할게”라는 짧은 말이 위로가 됐다. 소아암 환아를 둔 엄마들에게 “힘내세요 제가 함께 기도 할게요”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병원학교에서 봉사하며 엄마들을 계속 만나며 이들의 어려운 사정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님의 타이밍
지방에서 서울로 소아암 치료를 다니던 민지(가명) 엄마는 치료를 받는 동안 아이와 함께 묵으려고 찾아간 모텔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민지를 언뜻 본 주인이 전염병 환자 대하듯 황급히 쫓아내는 통에 그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항암치료 받는 아이들은 입덧하는 것 같이 먹고 싶은 게 떠올랐을 때 바로 만들어주지 않으면 못 먹는다. 그걸 잘 알던 그는 집에서 전화로 엄마들에게 아이들이 원하는 메뉴를 주문받아 만들어 병원으로 배달해줬다. 집도 신촌세브란스병원과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열무김치 비빔밥, 김치전, 만두 등을 1시간 안에 만들어 갖다 주면 아이들이 잘 먹었어요. 5살짜리 아이가 열무김치 비빔밥을 고추장에 비벼먹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려요.”

이런 과정을 통해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하는 지방에서 올라온 환아와 보호자들을 위한 쉼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3년이 지나도 쉼터 마련은 기미가 보이지 않아 거의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타이밍과 하나님의 타이밍은 달랐지만 가장 섬세하고 완벽하셨다.

2004년 1월 4일. 오래전부터 쉼터마련을 계획하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소아혈액종양과 유철주 교수가 연세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빛사랑후원회’를 결성했다. 회원 한분 한분이 소아암 환아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다. 박홍이 한빛사랑후원회 회장(연세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은 벽돌을 직접 그린 종이를 대학총장부터 동료 교수들에게 나눠주며 한 장당 만원을 후원금으로 받으며 모금운동을 했다. 정기후원자들도 생겨났다.

“유 교수님은 제게 ‘오래 동안 쉼터마련을 위해 기도해온 것으로 안다며 쉼터가 마련되면 상주할 수 있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당연하지요’라고 말했고요.”

2004년 10월 5일, 한빛사랑후원회는 신촌세브란스병원과 인접한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에 쉼터 ‘한빛하우스’를 개소했다. 1층 방 5개, 2층 사무실 공동공간, 3층 방 4개가 있다. 한빛사랑후원회는 2008년엔 연세대 교수진으로 구성된 이사진들과 전문인력을 만나 현재의 ‘소아암NGO한빛’으로 탄생했다.

배 권사는 하나님은 벽돌과 빵을 번갈아 가며 주셨다고 말했다. 힘들어서 “하나님 더는 못하겠어요. 도망가고 싶어요”라는 기도를 하면 사람을 통해 위로를 주셨다. 어느 날 한글이 서툰 베트남 사람인 동후 엄마가 서툰 한글 문자를 보내왔다.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알려주시고 또 손을 잡아주셨을 때는 정말 따뜻했습니다. 이제는 가족과 같습니다. 저도 한국 생활 잘 적응해서 따뜻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또 “권사님 그때 만들어주신 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요. 전 몸은 아팠지만 진짜 거기 있을 좋았어요. 청와대랑 청계천에도 데리고 가 주셨잖아요”라는 장거리 전화가 걸려온다. 그제야 그는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또 투정을 부렸죠”라며 회개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그는 “댁의 자녀는 몇 명인가요”라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한다.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동후 승흔 민규 예진… 한빛하우스에서 만난 아이들 모두가 나의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촌세브란스 원목실에서 자원봉사하는 남편 이규현(64) 목사와 함께 쉼터 사역을 변함없는 사랑으로 꾸려가고 있다.

□ 위로에 하나 더
“배 권사님. 오늘은 잔치국수해주세요. 청양고추 송송 썰어서요.”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로 한빛하우스 계단을 ‘쿵쾅쿵쾅’ 힘차게 오르는 동민(가명·6)은 즐거워 보였다. 지난해 가을 감기인 줄 알고 찾아간 병원에서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후 치료를 위해 서울로 오면서 이곳에 머물게 됐다. 동민은 이곳을 좋아한다고 했다. “전 여기가 좋아요. 시골 우리 집보다 훨씬 넓어요. 와 나는 집이 두 개예요. 시골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하하.”

배길선 권사는 항암치료라는 힘든 시기를 견디는 아이들과 부모를 더 가까이 돕기로 마음을 먹고 지내던 집을 정리하고 거처를 아예 한빛하우스로 옮겨서 24시간 그들과 함께 생활한다. 13년째이다. 잘 치료되고 건강을 찾는 아이들을 보면 정말 기뻤다. 반대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떠나보내는 가슴 아픈 날도 있다. 그럴 때면 부모의 손을 꼭 잡고 위로해 준다.

“저 역시 여전히 먼저 떠나보낸 아들 종수가 그립고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서로 가슴 한편에 아픈 상처를 품고 살기에 서로에게 위로가 돼고 그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빛하우스 각층마다 주방이 있다. 밑반찬과 필요한 식자재를 제공해주고 하루에 한 두 번씩 아이들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 받는다. 닭고기 참치김밥 떡볶이 생선구이 튀김 육계장 사골국 등 만들어 올려준다. 한 달 평균 30명이 머물고 있다.

그는 쉼터 이용자들의 종교를 묻지 않고 예배를 드리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저희는 예배를 드려요. 그동안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 중에 ‘거기 들어가서 같이 예배드려도 돼요?’라고 말하며 들어오기도 해요. 또 ‘거기 있을 때 진작 예배드리지 않은 게 후회돼요.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요. 그런데 그때 신앙생활을 강요했으면 아마 신앙생활 못했을 거라고 공통적으로 말해요.”

쉼터에 머무는 사람들은 배 권사 부부가 상주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어떤 말이라도 물어 볼 수 있고 응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언제든지 병원에 데려다 줄 수 있기에 든든하다.

소아암 NGO 한빛에 의하면 소아암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은 약 2만5000명이며, 연간 신규 발생 소아암 아이들은 1200명에 달한다. 이들은 투병기간이 평균 최소 2년에서 10년 이상으로 오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소아암치료병원은 주로 수도권에 몰려 있고 지방에서 온 투병생활은 치료비외 숙박 생활비 등이 막대하다. 소아암 아이들을 위한 쉼터는 전국에 17곳 뿐이다.

이지현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