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간 회장 집에 개 사료 주러 갔었다”… ‘직장갑질’ 사례

입력 2017-12-15 07:40

직장인 A씨는 명절에 가족여행을 떠난 회장 집에 닭과 개의 사료를 주러 가야 했다. 업무시간에 닭 사료를 사러 가는 일도 왕왕 있었다. 회장은 일요일에 직원을 불러 운전을 시키려고도 했다. “일이 있어 못 간다”고 하자 회장 아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휴일에 일을 시키려면 수당을 줘야 한다’고 맞서자 ‘(운전 업무도 포함된) 포괄임금’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A씨 사례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접수한 갑질 제보 중 하나다. 직장갑질119가 11월 한 달 동안의 성과를 담아 펴낸 보고서에는 이 외에도 갑질의 각종 실태가 담겨 있다. 주말에 병원장 자녀 결혼식에 동원돼 각종 잡무를 도맡아야 했던 병원 직원과 회사 직원들이 먹을 김장을 하는 데 차출된 여직원도 여럿이었다. 입사할 때 ‘잠수 방지용 보증금’으로 30만원을 냈다는 사례도 있었다.

14일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지난달 하루 평균 68건의 도움 요청이 들어왔다. 총 제보 건수는 2021건이었다. 임금과 관련된 제보가 420건(20.78%)으로 가장 많았고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내용이 388건(19.20%)으로 뒤를 이었다. 야근이나 휴일근무를 강요하는 식으로 노동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경우도 246건(12.17%) 접수됐다.

직장갑질119에 제보가 폭발적으로 몰린 이유는 접근성을 높인 상담방식 덕분이다. 직장갑질119는 누구나 접속 가능한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통해 1차 상담을 진행하고 이메일 등으로 상세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다. 무료 상담인 데다 제보자의 신원이 비밀로 보장된다는 점도 한몫했다. 노동조합이 없는 소규모 사업장이나 병원처럼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불이익을 당해도 호소할 곳이 마땅치 않다. 직장갑질119 측은 “노무사 변호사 등 노동 전문가 241명이 재능기부를 통해 자발적으로 일한다”고 설명했다.

직장갑질119의 인기는 그동안 갑질을 당하면서도 속으로 삭히고 참아왔던 이들이 많았음을 방증한다. 특히 이곳에 접수된 한림대성심병원의 장기자랑 강요 사례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직장갑질119의 문을 두드리는 이가 큰 폭으로 늘었다. 대부분 “이런 경우도 위법이냐, 갑질이냐”고 조심스럽게 묻고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갑질 중에서도 임금체불 등 명백한 범법행위는 상담을 받아 해결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유경 노무사는 “임금체불은 크게 연장·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수당을 주지 않거나 11개월짜리 편법 계약으로 퇴직금을 떼먹는 경우, 포괄임금제라는 핑계로 월 수십 시간의 연장근로수당을 회피하는 경우로 나뉜다”며 “법적으로 따져보면 받아야 할 돈인데 못 받은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직장 내 따돌림처럼 법적 규정이 미비한 영역도 있다. 최근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해 생긴 우울증을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사례가 늘고 있긴 하지만 관련된 처벌 조항은 없다. 김 노무사는 “근로기준법에 법적 근거를 만들거나 새로운 법을 만드는 방식으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주언 기자 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