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한국 여성도 계속 “미투”를 외치고 있었다

입력 2017-12-15 07:34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주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사람들’을 선정했다. ‘미투(#MeToo)’ 해시태그를 이용해 “나도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며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여성들이다.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지난 10월 15일 미투 캠페인을 제안한 지 1주일 만에 트위터에만 100만건 넘는 ‘미투’ 게시물이 올라왔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정계·언론계·문화계 인사까지 폭로에 가담했다. 도화선이 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은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났다. 존 코니어스 하원의원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CBS와 NBC 간판 앵커는 해고됐다. 최소 74명의 공인이 비난에 직면했다고 타임은 분석했다.

약자의 폭로와 사회적 연대, 실질적 변화. 이런 캠페인이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적어도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벌어진 일련의 해시태그운동을 살펴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한국 여성도 계속 “미투”를 외치고 있었다.

#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지난해 10월 소셜미디어에서 배용제 시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들은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배 시인이 학생들을 자신의 창작실로 불러 성관계를 제의했다” “‘내가 네 첫 남자가 돼주겠다’ 등의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폭로했다.

침묵했던 다른 피해자들도 입을 열었다. 거물급 작가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문단을 넘어 미술·영화·음악 등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가 ‘#○○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타고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한국판 미투 캠페인이었다.

배 시인은 지난 2월 위력에 의한 미성년자 간음·성희롱 혐의로 구속됐다.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중 일부는 사과문을 게시하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반면 피해자를 형사 고소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연대 단체 ‘셰도우 핀즈’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해시태그 폭로를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거나 고소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며 상담을 요청한 사람이 50명에 달했다.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

해시태그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는 2015년 ‘자취방’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사진집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했다는 논란이 일면서 지난 2월 등장했다.

초기에는 ‘여성의 방은 깔끔하고 잘 꾸며져 있다’는 편견을 깨는 유머였다. 그러나 점차 한국에서 자취 여성으로 살며 겪은 공포를 공유하는 장으로 변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쫓아 들어온 남성, 배달원의 음흉한 문자, 샤워 중 밖에서 들리는 ‘찰칵’ 소리….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방 안을 훑어보는 남성 때문에 공포에 시달렸다는 한 여성은 “혼자 잠드는 밤이 하루하루 목숨을 건 생존처럼 느껴졌다”고 호소했다.

이 해시태그는 성범죄 피해뿐 아니라 여성이 느끼는 일상적 공포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여성들은 “귀가시간을 불규칙하게 하라”거나 “택배 용지를 없앨 때 파쇄기를 사용하라” 등의 조언을 하며 서로의 안전을 빌었다. 저렴한 ‘창문방범 클립’을 소개한 게시물은 2000회 이상 리트윗되기도 했다.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4년간 스토킹하며 성폭행과 살해 협박을 일삼고 내 신상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했던 남성을 고소했더니 경찰이 이렇게 말했다. ‘예뻐서 좋겠네’.”

지난달 10일 가정폭력·성폭력 상담 기관인 한국여성의전화가 ‘#경찰이라니_가해자인줄’ 캠페인을 제안했다. 경찰에 의해 2차 피해를 입은 사례를 고발하는 이 해시태그운동은 사흘 만에 20만명이 참여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공개한 사례집에는 트위터에 올라온 증언 112건이 담겼다. 가정폭력을 신고하자 “아빠가 화나서 그럴 수도 있지”라며 수수방관하고, 불법 촬영 피해자의 옷차림을 지적하고, 강간당할 뻔한 피해자에게 “네가 좋아서 그랬나보다”라고 말하는 공권력의 ‘폭력’이 적나라하게 담겼다.

이후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경찰에 대한 가정폭력·성폭력 인식 재교육과 부적절한 대응의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지난달 11일부터 한 달간 1만5000여명이 이 청원에 서명했다.

#변한것과_변하지않은것

소셜미디어가 ‘미투’로 뒤덮인 10월 말 한국에선 ‘한샘 성폭행’ 논란이 불거졌다. 가구업체 한샘의 신입사원은 인터넷에 글을 올려 불법 촬영과 성폭행, 성폭행 미수 피해를 연달아 겪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꽃뱀’으로 몰리는 사내 분위기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성폭행 피해를 알린 뒤 회사로부터 풍기문란 징계까지 받았다고 했다.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했지만 피해자는 다시 변호사를 선임한 상태다.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기념해 등장한 해시태그 ‘#변한것과_변하지않은것’의 게시물을 살펴보면 대다수 네티즌이 ‘변한 것’으로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게 됐다”는 점을 꼽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나를 억울하고 예민하게 만드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해시태그 여성운동은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여성들의 연대를 이끌어냈지만 여전히 현실의 벽은 높았다.

당신이 “미투”라고 말하는 날까지

2014년 미국에선 미투 캠페인과 비슷한 성격의 ‘여자는 다 겪는다(#YesAllWomen)’ 해시태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에는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지만 “해시태그운동은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는 회의적 시선도 따라왔다.

미국 IT 전문지 기자 제시 헴펠은 미투 캠페인 직후 분노를 쉽게 표출하는 소셜미디어가 실제 사회 변화에는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다. 페미니스트 블로그 ‘페미니스팅’ 설립자 제시카 발렌티는 피해자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가해자 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우려 속에서 남성들의 공감과 지지는 유의미한 변화였다. 영국 텔레그래프가 미투 캠페인을 1주일간 분석한 결과 트위터 참여자 중 30%가 남성이었다. 남성들은 캠페인 취지에 공감할 뿐 아니라 ‘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Howiwillchange)’ ‘내가 그랬다(#Ididthat)’ ‘그럼에도 그는(#Himthough)’ 등의 해시태그를 새로 만들었다. 자신이 여성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털어놓고 어떻게 변할지 다짐하는 글이 쏟아졌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남성들의 ‘응답’이었다.

미투 캠페인은 본래 타라나 버크라는 흑인 여성운동가가 10년 전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버크는 2007년 성폭력 피해자 지원 시스템에서 소외된 유색인종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들을 돕기 위해 ‘미투’라는 구호를 사용했다. 그는 NBC ‘투데이쇼’에 출연해 “난 처음부터 ‘미투’가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며 “이제 이 운동이 정말로 시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분명 한국에서도 그렇다.

글=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