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의 눈물’ 제보 하루 수십건… ‘직장갑질 119’ 르포

입력 2017-12-15 07:28
사진=서울 중구의 한 건물에서 14일 변호사 노무사 시민단체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직장갑질119 스태프 10여명이 주간 회의를 하고 있다.

‘을’을 위한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스태프의 하루는 제보를 확인하는 일로 시작된다.

한파가 몰아친 14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도 스태프인 박점규·오진호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들이 이메일과 밴드, 오픈채팅 등을 통해 들어온 제보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박 위원은 “하루 평균 수천 건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수십통의 메일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직장 갑질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직장갑질119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등 비정규직 운동단체 활동가와 노동인권 현실을 위한 노무사모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의 노무사·변호사 241명이 참여해 지난달 1일 출범한 단체다.

박 위원이 전용 이메일 계정에 접속하니 전날부터 도착한 메일 20여건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 메일에는 ‘회사가 여직원에게 드레스를 강요하고, 춤 연습을 매일 두 시간씩 시킨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못 보게 한다’ ‘임금을 떼였다’ 등의 갑질 사연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이건 좀 중요한 내용이네요.” 박 위원이 메일 하나를 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읽기 시작했다. 메일에는 실명을 밝히지 않은 토목설계 근무자의 사연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근로계약서 상에는 8시간 근무인데 과중한 업무 탓에 하루 평균 11시간을 근무하고 있다”며 “관공서의 입찰이나 수의계약으로 진행되는 업무를 하다보니 공무원들이 빨리 해달라고 하면 해야 한다. 과중한 업무에 돌연사가 겁이 난다”고 했다. 박 위원은 “업태 자체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갑질119는 주로 카톡과 이메일로 상담을 한다. 카톡방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노무사·변호사 등이 실시간으로 답변하고, 이메일은 변호사·노무사로 구성된 전담팀이 먼저 확인한 뒤 법률·노무 상담 등 팀에 배당한 뒤 해결책을 제시한다. 임금체불, 갑질 등 사안이 심각할 때는 제보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일부는 고용노동부 진정이나 국가인권위원회 제소, 공정위 신고, 손해배상 청구 등 법적 지원으로 이어진다. 언론보도로 공론화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제보가 원활하게 해결된 것은 아니다. 박 위원은 “일반인들은 제보가 처음이다 보니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일기를 작성하거나 녹음·녹취를 하는 등 증거를 모으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직장갑질119가 출범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박 위원은 “광화문 촛불집회 때 현장에 설치된 천막에 머물렀는데 토요일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촛불을 들기 위해 나오는 젊은 친구들이 많았다”며 “‘이들의 삶을 바꿀 방법은 없을까’ 고민한 게 계기였다”고 했다. 이들은 5개월간 청년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익명으로 이용 가능한 오픈 카톡방을 개설했다.

제보 중 기억에 남는 걸 묻자 오 위원은 “직장에서 상사에게 맞는 등 인격적 모멸감 때문에 손이 떨려 메일을 제대로 보낼 수 없었다는 분, 농약 먹고 죽으려 했다는 분까지 있었다”며 “이렇게까지 내몰려도 되나 싶었다”고 했다.

오후 2시에는 스태프 1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주간 회의가 열렸다. 이들은 “더 자유롭게 제보할 수 있는 공간을 늘려야 한다” “아직 조명되지 않은 사업장의 갑질도 발굴해야 한다” 등의 의견을 나눴다. 제조업 근로자에 대한 대책도 논의됐다. 내년 최저임금이 올랐을 때 노동자의 수당을 기본급에 몰아넣는 등 ‘갑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 위원은 “업종별로 모임을 활성화시켜 교류하게 만들고,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로 발전하는 데 밑돌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직장갑질119의 목표”라고 말했다.

글·사진=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