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2일(현지시간) “전제조건 없이 북한과 첫 만남을 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한반도 정세가 중대 분수령을 맞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는 미국 정부의 기존 입장을 뒤집은 파격 발언이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제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北의 유일한 안전보장은 핵포기뿐”
미국은 지난달까지만 해도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건 누차 밝혔지만 어디까지나 ‘핵을 포기하면’이라는 전제가 따라다녔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 8월초 국무부 정례브리핑에 등장해 “어느 시점에 북한과 앉아서 북한이 추구하는 안보와 경제적 번영의 미래에 대해 대화하고 싶다”면서도 “대화 조건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거나, 핵무기를 미국은 물론 역내 국가들로 날려보낼 능력을 보유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하지만 핵포기를 전제로 한 대화 제의는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한이 ‘괌 포위사격’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공개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을 위협하면 화염과 분노에 휩싸일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북·미 간 초강경 대치 상황이 계속됐다. 북한은 6차 핵실험에 이어 지난 9월 15일에는 중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을 발사하는 등 도발을 이어갔다.
◇ “60일간 도발 안하면 대화”
미국의 입장 변화가 감지된 것은 ‘화성-12형’ 발사 이후 북한이 갑자기 잠잠해지면서부터다. 북한이 70일 넘게 미사일 도발을 하지 않으면서 북·미 간 물밑접촉이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특히 북핵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조지프 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지난 10월말 미국외교협회 행사에서 “북한이 60일간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면 이는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재개할 필요가 있다는 신호”라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북·미 대화 움직임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헤더 노어트 미 국무부 대변인은 “지금은 대화할 시점이 아니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보여준다면 생각해볼 수 있지만 북한은 진지한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미국이 이른바 ‘60일 플랜’을 제시하면서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지만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정상각도로 발사할 경우 워싱턴DC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신형 ‘화성-15형’ 시험 발사에 성공한 뒤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 12일 군수공업대회에서 “원자탄과 수소탄, 대륙간탄도로켓 화성-15형을 비롯한 새로운 전략무기 체계들을 개발하고 국가핵무력 완성의 대업을 이룩한 것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사생결단의 투쟁으로 쟁취한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역사적 승리”라고 강조했다.
◇ “북한이 원하면 언제든 조건 없이 대화”
틸러슨 장관의 이번 대화 제의는 그간 미국이 요구했던 핵포기나 60일 간의 도발 중단과 같은 전제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띠고 있다. 그는 “(북한과의 첫 만남에서) 날씨 얘기를 할 수도 있다”며 “여러분이 사각 테이블인지 둥근 테이블인지 흥미를 갖는다면 그것에 관해서도 얘기할 수 있다”고 했다.
틸러슨 장관은 “북한과 대화하기 전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하라고 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며 “일단 만나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관한 로드맵을 논의할 수 있다”고도 했다.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고도화되고, ‘국가핵무력 완성’을 천명한 시점에 ‘선 핵포기, 후 대화’를 앞세우기보다는 북핵해법에 대한 단계적 구상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북한의 대응이다.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최근 러시아 하원의원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면 미국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전략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국제사회가 수용하기 힘든 핵보유국 지위를 재차 강조하는 것은 핵·미사일 기술 고도화를 완성하기 위한 시간벌기용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