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북한이 나란히 ‘대화’를 얘기했다. 그러나 양측이 말한 ‘대화의 조건’은 서로 차이가 있었고, 기존 입장과도 달라졌다. 대화에 한층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미국이었다.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은 북한을 향해 “날씨 얘기라도 좋다. 일단 만나서 얼굴 보고 대화하자”며 파격적인 공개 제안을 했다. 자성남 유엔주재 북한 대사는 “조건이 갖춰지면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말하는 조건은 최근 러시아를 통해 미국에 전달된 상태다.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무조건 대화’를 주문하며 한껏 문턱을 낮췄지만, 북한은 전제조건을 ‘적대시 중단’에서 ‘핵보유국 인정’으로 바꿔 대화 문턱을 높인 형국이 됐다.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북·미 힘겨루기의 양상이 다소 바뀐 것이다.
◇ 틸러슨 “날씨 얘기, 탁자 얘기라도 좋다… 일단 만나자”
“북한이 원하면 그냥 날씨 얘기를 할 수도 있다. 마주앉은 테이블이 원형인지 사각형인지 논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일단 만나자.”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2일(현지시간) 북한에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제안했다. 북한을 향한 그의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무슨 얘기라도 좋으니 마주앉아 얼굴 보고 대화하자”며 아주 직설적으로 대화 의지를 표현했다.
그는 미국의 기존 대북 접근법이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다고 인정했다. 미국은 북한을 향해 “핵 포기 의지를 밝히면” 대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이를 “핵·미사일 현상 동결”로 낮춘 터였다. 또 “60일간 도발을 중단하면 대화 조건이 갖춰진 것”이란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틸러슨 장관은 이런 ‘전제조건’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동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할 준비가 돼야만 미국이 대화 테이블에 나선다는 전제조건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핵 프로그램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 부분을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틸러슨 장관의 ‘조건 없는 대화’ 제안은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과 국제교류재단이 워싱턴에서 공동 주최한 ‘환태평양 시대의 한·미 파트너십 재구상' 토론회에서 나왔다. 연설 후 문답에 나선 그는 “우리는 북한과 언제든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 전제조건 없이 북한과 기꺼이 첫 만남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일단 만나서 서로 얼굴을 보고 얘기하면 우리는 로드맵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북한에 첫번째 폭탄이 떨어지기 직전까지 외교적 해결을 모색할 것”이라면서 “북한과의 외교는 가능하다. 외교는 군사옵션의 지원을 받으며 진행된다. 만약 외교적 해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내가 실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첫번째 폭탄이 (북한에) 떨어질 때까지 외교 해법을 계속 모색할 것”이라고도 했다.
틸러슨 장관은 대화를 제안하며 북한을 향해 “다른 관점”을 주문했다. 북한이 대화 테이블로 나온다면 핵과 관련해 ‘다른 선택(different choice)'을 기꺼이 하겠다는 관점을 갖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북한 문제의 외교적 해결에)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매티스 국방장관이 자신의 차례가 되면 성공하리라는(전쟁을 승리로 이끌리라는) 점도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 ‘적대시 중단’→‘핵보유국 인정’… 대화문턱 높인 北
자성남 유엔주재 북한 대사의 대화 언급은 틸러슨 장관의 제안보다 앞서 나왔다. 자 대사는 12일 중국 베이징에서 일본 NHK 취재진과 만나 “조건이 갖춰지면 미국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미국의 직접 대화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나온 답이었다. NHK는 자 대사가 말한 ‘조건'에 대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자 대사는 이날 평양을 출발해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 취재진을 만났다.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하느냐”는 추가 질문에는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이라고만 답했다. 북한 노동신문은 지난달 논평에서 “미국이 우리나라(북한)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도 최근 평양을 방문한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에게 “한반도 정세가 오늘날의 상황에 이른 것은 미국의 적대적인 정책과 핵 위협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좀더 구체적인 조건은 러시아를 통해 미국에 전달됐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 7일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외무장관 회의에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과 별도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북한은 미국과 직접 대화를 원한다. 러시아는 그런 협상을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이달 초 하원의원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해 고위급 인사들을 두루 접촉했다. 라브로프 장관이 전한 북한의 입장은 방북했던 하원 대표단을 통해 파악된 것으로 추정된다. 라브로프 장관은 “우리는 북한이 무엇보다 안전보장에 대해 대화하길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며 “틸러슨 장관과 미국 동료들이 (북한의 희망에 관한) 우리의 얘기를 들었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