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웅 연출 한일합작 연극 ‘페르귄트’, 도쿄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20주년을 빛내다

입력 2017-12-13 05:55
양정웅이 일본 도쿄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연출한 연극 ‘페르 귄트’의 한 장면. 페르 귄트 역의 일본 배우 우라이 겐지와 트롤 공주 역의 한국 배우 윤다경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호소노 신지 제공

지난 8일 600석 규모의 일본 도쿄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올해 20주년 기념공연 작품 가운데 하나인 연극 ‘페르 귄트’의 막이 올라갔다. 한국 연출가 양정웅이 연출을 맡은 이 작품에는 일본 배우 15명과 한국 배우 5명이 출연했다.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극장인데다 양정웅이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연출을 맡고 있는 만큼 이번 작품은 개막 전부터 일본의 주요 매체에 잇따라 소개되는 등 높은 주목을 받고 있다.

‘페르 귄트’는 근대연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이 1867년 발표한 5막의 극시다. 노르웨이의 민속설화를 모티브로 쓰여진 이 작품은 주인공 페르 귄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여정을 그린 대작이다.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보편적 주제 안에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덧없음, 방탕한 연인을 끝까지 기다리는 여인의 순수함 등이 녹아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워낙 방대한데다 주제가 철학적이라서 무대에 자주 올려지지 않는 편이다.

양정웅은 지난 2009년 LG아트센터에서 자신이 이끄는 극단 여행자와 ‘페르 귄트’를 공연한 바 있다. 그는 원작을 현대로 옮겨오면서 에피소드를 추리고 대사를 축약시키는 등 이야기를 템포감있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페르 귄트와 귀족들의 대화는 인터뷰 장면으로, 난파하는 배 장면은 비행기 추락으로 옮겨졌다. 배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바탕으로 자전거, 우산 등 상징적인 소품 그리고 작곡가 장영규가 만든 미니멀한 전자음악이 어울어진 이 작품은 초현실적이고 모던한 미장센이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은 초연 당시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12년 앙코르 공연된데 이어 같은 해 호주 아들레이드에서 열린 ‘오즈 아시아 페스티벌’과 이듬해 일본 도쿄에서 열린 베세토 연극제에도 초청된 바 있다. 이번에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공연된 ‘페르 귄트’는 앞서 한국 버전의 콘셉트를 기본으로 했지만 배우, 극장 규모, 무대 및 의상 디자이너, 작곡가 등이 바뀌면서 전반적인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무대세트만 보더라도 한국 버전의 경우 뒤편에 불투명한 반사판을 뒷벽 전면에 세우고 바닥에 흙을 깔았지만 이번 일본 버전은 옆에 높은 단을 세워 입체적으로 활용했다.

양정웅이 일본 도쿄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연출한 ‘페르 귄트’의 한 장면. 일본 배우 15명과 한국 배우 5명이 출연한 이 작품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무대에서 동시에 쓰인다.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호소노 신지 제공


무엇보다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공연이 한국 버전과 다른 것은 무대 위에서 일본어와 한국어가 동시에 사용된다는 점이다. 극단 여행자 소속인 한국 배우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움직임으로 작품의 앙상블을 이끄는 한편 극중에서 마을 사람들이나 인간과 다른 존재인 트롤 등 페르 귄트와 이질적인 존재로 등장할 때 한국어 대사를 한다. 일본 연극 칼럼니스트 우에노 노리코는 “양정웅 씨의 ‘페르 귄트’는 에너지와 스피드가 넘쳐서 관객들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면서 “무대 위에서 일본어와 한국어의 두 언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이질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 캐스트의 경우 페르 귄트 역의 우라이 겐지를 비롯해 슈리, 마리사 등 무대 TV 영화 등을 바쁘게 오가는 스타급 배우들이 주조역으로 캐스팅 됐다. 페르 귄트를 매력적인 몽상가로 그려낸 우라이는 “입센의 ‘페르 귄트’가 워낙 방대한 작품이기 때문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반복해서 읽었다”면서 “원작을 현대로 옮겨온 양정웅 씨의 해석은 페르 귄트의 여정을 요즘 관객들도 공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작품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한일 관계 속에서도 문화예술 교류의 모범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면서 “연습시간 내내 프러덕션의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특히 양정웅 씨와는 이제 형제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은 나가이 다에코 세타가야문화재단 이사장 겸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 극장장이 2013년 도쿄에서 열린 베세토연극제에서 양정웅의 ‘페르 귄트’를 본 것이 계기가 됐다.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는 그동안 영국 연출가 사이먼 맥버니가 이끄는 극단 컴플리시테와 ‘코끼리의 소멸’ ‘슌킨’ 등을 제작하는 등 해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수작을 여러 편 만들어왔다. 나가이 이사장은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는 올해 20주년 기념 공연 시리즈를 3년 전부터 준비했다. ‘페르 귄트’를 본 순간부터 양정웅 씨와 20주년 기념공연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의 ‘페르 귄트’는 한국 프로덕션에서 시작됐지만 사실상 신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달라졌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번 작품은 12월 24일까지 도쿄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공연된 후 12월 30~31일 효고현립예술센터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