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일 기자의 교회 톺아보기] 성장과 분열의 한국교회사

입력 2017-12-08 15:59

한국기독교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급성장했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2013년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 때 한국을 방문한 세계 기독교 대표들도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폭발적 성장의 금자탑은 교단 분열이라는 상처에 뿌리를 내렸다. 반쪽짜리 영광이다. 분열이 오히려 교세 성장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점수를 주려고 해도, 분열은 교단 간에 치열한 경쟁과 갈등을 불러왔다. 결국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걸림돌이 됐다.

한국기독교가 하나로 통합됐던 적이 있긴 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하나의 교단이 출범했다. 일제는 패망을 목전에 둔 1945년 7월 여러 교단을 일본기독교단 산하에 조선교단으로 묶었다. 원활한 통제를 위해서였다.

통합의 여정은 길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뒤 교단 재건운동이 시작됐다. 운동의 목표는 통합된 기독교단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존 조직을 살리는 것이 한국교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 지도자들은 교단 명칭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꾸고 1945년 9월 8일 조선기독교남부대회를 소집했다. 결과적으로 이 회의는 몇몇 지도자들이 퇴장하면서 파행으로 끝났다. 이에 굴하지 않은 지도자들은 이듬해인 1946년 4월 30일 2차 남부대회를 열지만 “각 교파는 각자의 성격대로 활동한다”고 결의한다. 원래대로 돌아가자고 결정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등은 교단 재건을 서둘렀다.

교단들은 원래의 자리로 모두 돌아갔다. 그리고 본격적인 분열의 역사를 썼다. 일제 강점기 당시 신사참배 여부를 놓고 1952년 교단 안팎에서 논란이 불거지면서 고려파(고신)가 분열했다. 1953년엔 신학의 정체성 문제로 기독교장로회가 분립을 결정한다. 1959년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과 조선신학교 부지 구입 과정에서 발생한 3000만환 사기사건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과 통합이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분열은 세포분열이 연상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교단이 많아지면서 교단명을 둘러싼 해프닝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게 예장 합동과 통합이다. 두 교단은 1959년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각각 총회를 열고 ‘연동 측’과 ‘승동 측’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승동 측이 1960년 고신 측과 교단 통합을 결의했다. 안타까운 점은 불과 2년 만에 또 분열했다는 점이다. 승동 측은 고신 측과 ‘합동’했다는 데 방점을 찍고 교단명을 예장합동으로 정했다. 통합은 ‘장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바람을 교단명에 담았다.

단어는 달라도 의미는 하나다.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두 교단명을 볼 때면 머리를 갸웃하기 일쑤다. 한국기독교의 교단은 200개를 상회할 것이란 추측만 있지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렵다. 성장과 분열의 역사를 동시에 쓰고 있는 한국기독교. 이제는 성숙이라는 숙제를 남겨두고 있다.

장창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