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적폐를 넘어] 사람 위에 사람 있다?… ‘甲질’ 뿌리는 경쟁사회

입력 2017-12-08 09:27 수정 2017-12-08 09:28

모욕을 선물하는 사회
당한 모욕 갚을 기회 노리는

원한의 피라미드 구조
악플 등 폭력 일상화된 상태
한국이 유독 심한 이유는
노동시장 과잉경쟁이 문제
권위주의 문화도 한몫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제도 개혁이 무엇보다 중요
인간의 존엄성 가르치는
공동체 중심 시민교육 필요

“돈과 지위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이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심이 있었다면, 직원을 노예처럼 여기지 않았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 갑질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에게 1심 재판부는 2015년 이같이 판시했다.

수년이 지났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 자존감을 무너뜨린 사건’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백화점 주차요원에게 폭언을 하고 무릎을 꿇린 모녀, 경기도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의 퇴출을 강요한 주민 대표, 공관병을 하인처럼 다룬 육군 대장과 그의 부인, 간호사에게 야한 춤을 강요한 병원, 변호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한 재벌 3세…. 최근 보도된 갑질 사례는 열거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많다.

‘오랫동안 쌓여 뿌리박힌 폐단’, 이른바 적폐를 청산하는 게 시대정신인 지금 ‘생활 속 갑질 청산’ 운동도 본격화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제언이다.

모욕 사회

문화학자 엄기호는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서 한국 사회를 모욕을 선물하는 사회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늘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살면서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려줄 기회만을 바라는 원한의 피라미드”라고 설명했다. 을이 갑에게 갑질을 당하면 이 갑질을 병(丙)에게 을질로써 되갚아주는 사회, 즉 모욕이 일상화된 사회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모욕은 한국 사회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게시판 댓글에서 악플(악성 댓글) 대 선플(선한 댓글)의 비율은 4대 1이다. 1대 4인 일본, 1대 9인 네덜란드에 비해 악플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권력을 가진 갑의 위치에서만 모욕을 행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국민에게 이 같은 폭력이 내면화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조사다.

모욕이 일상화된 사회에선 모욕의 위계적 형태인 갑질도 만연하게 된다. 2015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26세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95%의 응답자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갑질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데 매우 동의(44%)하거나 동의하는 편(51%)이었다. ‘갑질이 모든 계층에 만연해 있다’는 응답은 77%로 ‘일부 계층에 해당한다’(20%)를 크게 앞질렀다.

사회 곳곳에 갑질이 만연하면 거꾸로 인간의 존엄성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2010년 미국 심리학자 에드 디너의 연구팀이 130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 비율이 덴마크는 94%, 미국은 88%인데 반해 한국은 56%에 그쳤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도 72%였다. 존중이 사라진 자리에선 공동체도 무너진다. 실제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공동체지수(공동체 생활로 위안을 얻고 정체성에 도움을 받는 지수)가 지난해 꼴찌였다.


압축적 근대화 부작용

한국 사회의 갑질이 유독 심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양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원인 분석도 다양하다. 전문가들은 노동시장의 과잉 경쟁이나 한국 사회 특유의 권위주의, 왜곡된 능력주의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갑질이 심해진 때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시점으로 봤다. 최 교수는 “IMF 체제 이후 최소한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일부가 다수를 경쟁시키는 방식으로 시장 체제가 바뀌면서 국민 대부분이 경쟁에 내몰렸다”며 “일반 상품과 같은 수준으로 노동상품을 과잉 경쟁시키면서 노동자를 상대로 갑질을 하는 게 당연시됐다”고 설명했다. 한림대 성심병원의 간호사에 대한 갑질 사례에 대해서도 “간호사도 취업하려면 경쟁이 심한 상황이고, 간호사가 되고 나서도 실제로 일하기 위해선 대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병원과 간호사의 관계가 갑을 관계가 됐다”고 덧붙였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특유의 권위주의 문화가 문제라고 봤다. 노 교수는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태도가 충효와 같은 도덕적 체제로 포장돼 용인된 측면이 있다”며 “조직 내에서 권위주의적 태도가 갑질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우리가 압축적으로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인간 존엄성의 가치가 약화돼 갑질이 사회적 현상이 됐다”고 덧붙였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책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코리안드림의 토대지만, 동시에 사회적 신분 서열제와 더불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왜곡된 능력주의, 즉 갑질이라는 실천 방식을 내장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제도적 환경 새롭게 세팅

갑질 사회의 해법은 제도 개혁과 시민 교육이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1970, 80년대만 해도 동사무소 공무원들에게 음료수를 갖다 줘야 증명서 등을 빨리 발급해줬는데, 이를 금지하는 제도가 만들어진 뒤 그런 관행이 없어졌다”며 “갑질과 같은 한국의 특수성은 제도적 환경을 어떻게 세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 교수는 “갑질 관행을 없애기 위해선 개인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겠지만 제도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한국은 IMF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이긴 자와 패배한 자를 나누는 식의 노동 정책을 유지해 왔다”며 “노동 안정성이 떨어지고 복지 시스템도 받쳐주지 않는 현 시스템에서는 갑질이 사라지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의 노동 정책을 근본적·반성적으로 검토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잘살게 해준다는 명분으로 기득권의 권위주의와 갑질을 인정해 왔다”며 “인간에 대한 존중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국의 학교는 인간 존엄성이 배제된 권위적 교육만 해 왔기 때문에 권위주의가 시민들에게 내면화됐다”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프랑스에서 지역 기반의 공동체 중심 시민 교육을 했는데, 한국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글=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