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내년도 예산안 합의에 따른 커다란 후폭풍에 직면했다.
법정 처리 시한을 이틀이나 넘긴 합의였음에도 당 내에서는 “예산안을 너무 쉽게 합의해줬다. 여권의 희망사항이 대부분 반영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또 “국민의당은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며 실리를 챙겼는데 우리는 뭘 한 것이냐”는 볼멘소리 역시 제기된다. 한국당은 당론으로 공무원 증원과 법인세 인상 반대 입장을 정했지만 이미 예산안 처리를 막을 수 없어 속수무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한국당 의원총회는 원내 지도부에 대한 ‘성토의 장’이었다. 한국당 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국민의당이 예산안 협조로 돌아선 이상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원내 지도부의 협상력이 부족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한 의원은 “국민의당은 과거에도 캐스팅보터 역할을 했던 전례가 있다”면서 “처음부터 국민의당과 예산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뒤 협상에 임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신설되는 법인세 과세표준 구간을 2000억원 초과에서 3000억원 초과로 올린 것도 사실 저의 목소리였다”며 진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의원들의 성토는 그치지 않았다. 정 원내대표는 “본회의에 들어가 반대표를 던지면 된다”고 주장했지만 의총에서는 본회의 보이콧과 합의문 무효화 등 강경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나경원 의원은 “민주당이 과거 야당 시절 원내대표 합의안을 당 의총에서 추인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뒤집었다. 우리도 재협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총에서는 본회의장에 들어가 필리버스터(무제한 의사진행 방해)를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예산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매년 12월 1일 밤 12시까지만 가능하도록 한 국회선진화법 조항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없다. 일부 의원은 “내년 예산은 엎질러진 물이지만 내후년(2019년) 예산은 한푼도 합의해줘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당은 3시간 넘게 이어진 의총에서도 뚜렷한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정 원내대표는 “우리가 어떤 방법을 택하든 예산안이 통과되면 제1야당으로서 한계를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우리 주장이 정당했다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섭단체 지위를 잃어 예산안 협상 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바른정당도 한국당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는 최고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이 정부를 제대로 견제할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잘못된 합의에 이르게 됐다”고 한국당을 비판했다. 유의동 수석대변인도 전날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가 예산안 합의 후 입장을 바꾼 한국당을 겨냥해 ‘미친놈들’이라고 한 것을 언급하며 “욕먹어도 싸다. 한국당이 평소 보수의 맏형을 자임했지만 예산안 협상 과정에서 보수다움은커녕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고 혹평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