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오늘은 3만원어치만 부술게요”… 분노사회, ‘스트레스 해소방’ 풍경

입력 2017-12-01 07:40

“직장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겼어요.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답답해요. 상사를 때려주고 싶은데 그러지 않고 스트레스 풀 수 있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28세 여성 직장인이 이런 글을 올렸다.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많은 직장인의 공감을 얻었다. 댓글에 쏟아진 조언은 ‘잠을 자라’ ‘쇼핑을 해보라’ ‘운동이 최고다’ ‘나는 무조건 영화관에 간다’ 등 다양했다.

휴대전화로 ‘○○○ 때리기’ 게임을 이용해 스트레스를 다스린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게임 캐릭터에 상사 이름을 입력하고 명패를 들고 있는 그 캐릭터를 향해 계란을 던지거나 마구 때리는 게임인데 단계가 높아질수록 괴롭히는 방법도 업그레이드된다. 과격한 설정이지만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이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출시된 ‘사장·부장 껌’을 추천했다. “‘사장껌’ ‘부장껌’이라고 적힌 포장지를 확 뜯어서 씹어대면 답답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인의 스트레스는 학생 성인 가릴 것 없이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지난 7월 ‘스트레스 관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적 함의’ 보고서에서 학교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학생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라고 분석했다. 성인의 전반적인 삶 만족도는 OECD 38개국 중 31번째로 낮았다. 직장인 10명 중 7명이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트레스가 과도하게 쌓이면 충동적 행동이나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껏 차오른 불만을 함부로 표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런 사람을 위해 맘껏 소리를 지르고 그릇 등을 깨부수며 스트레스와 분노를 ‘안전하게’ 드러내도록 해주는 ‘스트레스 해소방’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다.

스트레스 해소방 ‘레이지룸’은 ‘짜증’ ‘왕짜증’ 등 5단계 프로그램을 갖춰놓고 있다. 손님이 직접 부수며 스트레스를 풀도록 준비한 망치와 밥통. 한쪽에는 물건을 부수는 도구로 일명 ‘빠루(노루발못뽑이)’도 준비돼 있다. 보호장구를 착용한 채 야구배트로 복사기를 내리치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 모습. 산산조각 난 그릇과 전자제품 파편(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레이지룸 제공

때리고 부수는 ‘분노의 방’

쨍그랑! “너는 뭐가 그리 잘났는데!”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얼핏 싸우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곳은 돈을 내고 분노를 터뜨리는 전용 공간이다. 서울 홍익대 부근의 스트레스 해소방 ‘레이지룸’은 하루 평균 15팀의 손님이 찾아온다. 지난 4월에 문을 연 뒤 6개월간 4000∼5000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박모(29·여)씨는 회사에서 근무하다가도 가끔 가슴이 답답해지고 무기력해진다고 했다. 야근은 일상이 된 지 오래고 잔소리하는 부장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한 달에 한 번 퇴근길에 이곳을 찾고 있다. 박씨는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준 상사 이름을 외치며 야구 방망이로 그릇들을 후려치면 속이 후련해진다”고 했다.

레이지룸에는 ‘짜증’ ‘왕짜증’ ‘빡침’ ‘개빡침’ ‘18’ 등 5단계 프로그램이 있다. 이용료는 최소 2만원부터 최대 18만원까지 다양하다. 단계마다 10∼15분간 깰 수 있는 그릇이 금액별로 차등 제공된다. 높은 단계를 선택할수록 시간과 그릇 수가 늘고 가전제품 등 부술 수 있는 물품 종류도 다양해진다. 소액의 청소비를 지급하면 손님이 원하는 ‘소품’을 직접 들고 올 수도 있다.

분노의 방에 들어가기 전 참가자는 서약서를 작성한다. 서약서에는 물건을 부수다 다치거나 사고가 날 경우 모든 책임을 이용자가 진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미성년자, 임산부, 노약자 등은 안전 위험 때문에 이용할 수 없다. 서약서에 서명한 뒤에는 그릇 파편에 대비한 안전모와 마스크, 장갑, 청력보호 귀마개 등을 착용해야 한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망치, 쇠파이프, 야구배트 등 준비된 도구로 물건을 깨부수며 마음껏 고성을 지를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 30대 ‘화병’ 환자는 최근 6년 사이 50% 이상 증가했다. 특히 남성 환자가 2011년 387명에서 2016년 846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청년층의 화병 원인은 취업 결혼 직장생활 등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이었다. 통계를 입증하듯 ‘스트레스 해소방’은 일과 진로 고민, 극심한 경쟁,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20, 30대가 주 고객이다.

원은혜(32) 레이지룸 대표는 “회사에 다니면서 이렇게 스트레스 풀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직접 차렸다. 스트레스를 치료하는 곳은 아니고 재미를 위해 마련된 곳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다’고 말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해외선 스트레스 해소에 탱크까지 동원

스트레스 해소방은 미국 러시아 이집트 일본 등에서도 성업 중이다. 미국은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스트레스 해소방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 7월 로스앤젤레스 도심에 문 연 ‘레이지 그라운드’는 그릇이나 가전제품뿐 아니라 정치인을 형상화한 인형까지 갖춰놨다. 최근 손님이 가장 많이 찾는 인형은 단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지만 힐러리 클린턴 전 대선 후보를 찾는 이들도 있다.

탱크로 자동차 등을 깔아뭉개게 해주는 스트레스 해소 업체도 등장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드라이브 어 탱크’란 회사는 T-55, 치프틴 MK10, IFV 등 여러 기종의 탱크와 전차를 구비해 고객을 유치하고 있다. 탱크로 차를 부수는 것부터 가건물 주택을 무너뜨리는 프로그램까지 있다. 가격은 299달러(약 32만원)∼2599달러(약 281만원)로 다양하다. 옵션에 따라 기관총과 대포도 발사하게 해준다.

독일에는 1분당 1.49유로(약 1900원)만 지불하면 전화로 마음껏 욕을 할 수 있는 전용번호가 있다. 2012년 등장한 이 서비스는 1년 365일 24시간 운영되며 “직통전화”로 불린다. 전화를 받은 직원들은 단순히 들어주는 역할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손님이 욕을 하다 막히면 “겨우 그것밖에 못해?” 하며 적극적으로 욕을 내뱉도록 ‘자극’을 주기도 한다. 공동창업자 슐트는 “우리는 언어적 스파링 파트너다. 전화로 욕을 퍼붓고 분노를 풀면 건강과 일상에 모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에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탱크로 차를 깔아뭉개거나 집까지 부수게 해주는 업체도 있다. 드라이브 어 탱크 웹사이트

스트레스, 나만의 대안 찾아야

한국공안행정학회가 펴낸 ‘분노범죄의 발생 원인과 대응 방안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폭력사범은 36만6000여명이었다. 이 가운데 스트레스와 분노조절 실패로 홧김에 범행한 경우가 40%를 차지했다. 연구진은 “분노조절 실패는 예상 밖의 폭력성과 공격성 표출로 이어진다. 극단적인 분노가 표출될 때 살인 등 강력범죄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분노사회’라는 한국에서 갈수록 늘어나는 ‘분노범죄’에 노출된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스트레스와 분노를 이렇게 때리고 부수며 풀어내는 방법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전문가의 시각은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긍정적 대안으로 평가하지만 공격적 폭력적 행동이 스트레스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주진 못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스트레스의 원인과 유형이 사람마다 다른 만큼 이를 푸는 최선의 방법도 각각 다를 수밖에 없으니 ‘나만의 대안’을 찾아 분노 상황이 생길 때마다 적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2017년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올 한 해 쌓인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날려버릴 나만의 방법을 생각해보자.

글=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