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막한 국립창극단의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다음 달 3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그런데 작품의 연출가는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 출신 연출가 옹켕센(54). 그는 2014년부터 올해까지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을 맡아 축제를 이끈 아시아 대표 연출가다. 동서양의 전통을 결합하는 연출로 주목받았고, 춤과 대사로 이뤄진 연극에 능통하다는 평을 받는다. 아래부터는 지난 21일 만난 옹켕센과의 문답.
창극에 흥미를 느낀 계기는.
“처음에는 판소리에 흥미를 느꼈어요. 1998년 한국에서 3주간 머물면서 전통예술을 공부했어요. 그때 판소리를 처음 접했죠. 판소리는 한 명이 노래를 부르는데도 큰 힘이 발휘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역사도 흥미로워요.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민중들과 소통한다는 점이 재밌었어요.”
“판소리는 스토리텔링에 치중하는 반면 창극은 극적 상황에 집중해요. 변화를 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죠. 그런 면에서 관객들이 접근하기 쉬워요. 창극은 때로 예쁘지 않은 소리가 나기도 해요. 그래서 더 매력적이에요. 서양의 오페라는 항상 너무 아름다운 소리만 나잖아요. 창극은 이런 면에서 감정의 깊이를 전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트로이의 여인들’은 판소리와 창극의 이런 두 요소를 모두 가져가려고 했어요. 창극의 극적 드라마를 판소리의 미니멀(불필요한 부분을 최소화)한 방식으로 전하려고 했습니다.”
‘트로이의 여인들’을 정의한다면.
“인간의 회복력과 생존을 향한 의지.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인간의 얘기예요.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는 초반부에 “물이로다. 물이로다. 막지 못한 물이로다”라고 대사를 하죠. 하지만 후반부에는 여인들과 하나가 돼서 물에 맞서 싸우려고 굳건히 서 있어요. 처음에는 여인들이 희생자처럼 나오지만 나중에는 삶을 통솔하는 용기를 지닌 강한 모습으로 나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극 중 여인들은 ‘감정의 전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은 비극적으로 치닫지만 끝까지 맞서 싸우는 힘을 보여주죠.”
작품의 매력은.
“보편적 얘기라서 매력적이에요. 처음에는 배우들마저도 ‘그리스 시대 드라마라서 낯설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연습이 진행됨에 따라 인물에 녹아들어가는 게 느껴졌어요. 처음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배우 한 명 한 명의 소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 슬픔과 분노, 한의 정서를 전할 수 있어요. 무대 자체도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미니멀하지만 대담하게 이미지를 사용했어요. 누구든 감정과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리허설에서 가장 중점 두는 부분은.
“배우들이 인물과 만들어내는 관계성을 주로 봐요. ‘트로이의 여인들’은 사회적 비극이 아니라 개인적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가 아니라 친숙한 얘기예요. 그래서 배우가 인물로 들어가 개인의 감정을 얼마나 끌어내는지가 중요합니다. 개인의 감정을 드러낼수록 관객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관객들이 몰입할 수 없을 만큼 작품이 진부해져요. 물론 트로이인들이 죽음을 당하고 왕조가 멸망하는 사회적 비극의 요소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얘기만 담으면 관객들이 공감하기 어려워요. 개인이 잃어버린 것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초연·싱가포르 공연과의 차이는.
‘트로이의 여인들’은 지난해 국내 초연에 이어 지난 9월 싱가포르 관객들과 만났다. 이번은 세 번째다. “초연 때는 거칠었어요. 하지만 날것 그대로에서 오는 감동이 있었죠. 싱가포르 공연은 창극을 모르는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만큼 다듬어졌죠. 물론 관객들은 풍부한 감정을 전달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해외 공연에 맞게 변화했죠. 이번 공연은 그동안 경험이 쌓여 깊이가 생겼어요. 배우들이 뼛속 깊숙이 인물을 체화해 그 자체가 돼 버린 느낌입니다. 날것 그대로의 공연과 다듬어진 공연의 장점이 한데 어우러졌다고 할까요.”
가장 기억 남는 장면은.
“작품에는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많습니다. 저한테 작품은 트로이의 여인들이 절규하는 모습이에요. 절규는 끝까지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주기도 해요. 특히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강렬합니다. 여인들은 큰 행동을 하지 않고 단순히 서 있죠. 그런 모습에서 자부심이나 의지를 보여줍니다. 가장 강렬하게 변해있는 거죠.”
“스파르타의 왕비였던 헬레네가 나오는 장면도 특별해요. 국립창극단의 배우 김준수씨가 나오는데요. 처음에 헬레네가 나오면 관객들이 왜 헬레네를 남자 배우가 맡았을까 의문을 느끼죠. 하지만 막상 헬레네의 얘기를 들으면서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어요. 헬레네가 나쁜 건가 옳은 건가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모두 남자 배우라는 것이 괜찮은 일인가하는 의문도 던져요. 결국에는 평범한 여인들의 얘기를 들은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인간관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창극의 진수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국가와 문화간 협업이 왜 필요한가.
“차이가 창조를 만든다고 믿습니다. 싱가포르는 기존 체제에 몰입돼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체제 속에서 살다보니 자기검열이 심해진 거죠. 이런 국제적 협업이 없다면 똑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작업을 반복할 뿐입니다. 협업을 하다보면 싸워야 하는 경우가 있어요. 전쟁터에서 벌이는 싸움은 아니고요(웃음). 서로 표현하기 위해 경쟁하고 투쟁해야 해요. 이 과정 중에 드러나는 진실이 있어요.”
향후 계획은.
“‘트로이의 여인들’은 내년 영국 브라이턴페스티벌과 런던국제연극제에 초청됐어요. 유럽의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페스티벌에서도 초청 의사를 밝혔어요. 성사된다면 올해 싱가포르와 내년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도 무대를 선보일 수 있습니다. 이어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열리는 ‘스폴레토 페스티벌’에서 창작 오페라를 연출할 계획입니다. 오페라는 폴란드의 유명 소설 ‘악어의 거리’를 각색해 만든 작품이에요. 또 예술감독을 맡으면서 5년간 보류한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권준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