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수법 속속 개발… 뛰는 단속에 나는 보이스피싱

입력 2017-11-28 07:35

지난해 10월 A씨는 캐피털사 직원이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저금리의 정부 지원 햇살론 대출을 해줄 수 있는데, 신용등급을 높이기 위해 기존에 저축은행에서 받은 1800만원의 대출금을 상환하라”며 계좌를 불러줬다. A씨는 이를 믿고 불러준 계좌로 돈을 입금했으나 연락이 두절됐다.

B씨는 지난 4월 경찰을 사칭한 사기범으로부터 “국제 사기를 당해 당신의 계좌에 있는 돈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사기범은 “계좌에 있는 1000만원을 인출해 냉장고 속에 넣어두면 경찰을 보내 안전하게 보관해주겠다”고 했다. B씨는 이 말에 속아 은행에서 돈을 찾아 냉장고에 넣어뒀다. 그리고 불안한 마음에 이웃주민에게 이를 알렸다. 다행히도 이웃주민이 보이스피싱임을 눈치채고 경찰에 신고해 돈을 찾으러 온 사기범은 잡혔다.

정부가 보이스피싱 근절을 위해 ‘전쟁’까지 선포하고 나섰지만 사기범들의 진화하는 범행수법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대출을 빙자해 사기를 치거나 직접 현금을 전달받는 등의 신종 수법 탓에 올해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는 증가세로 돌아섰다. 27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상반기 월 평균 보이스피싱 피해액 규모는 173억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지난해 월 평균 피해액보다 8.1% 늘어난 액수다. 2014년 이후 줄어들던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가 신종수법과 함께 다시 늘고 있다.

2015년까지만 해도 경찰·검찰·금감원 직원이라고 속이는 ‘정부기관사칭형’이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지난해부터는 A씨 사례처럼 거짓으로 대출해주겠다며 돈을 뜯는 ‘대출빙자형’이 큰 폭으로 늘고 있다. 대출빙자형 보이스피싱은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준다면서 선이자, 수수료, 기존 대출금 상환 명목으로 돈을 가로채는 수법이다. 대출빙자형 보이스피싱은 지난해 월 평균 피해액이 112억원으로 조사돼 처음으로 정부기관사칭형 피해액(48억원)을 넘어섰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출빙자형 보이스피싱의 경우 피해자들이 신용등급이 낮고 급전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속기 쉽다”고 설명했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막기 위해 지연이체제도가 도입된 후 현금을 직접 받아가는 기상천외한 수법도 등장하고 있다. 지연이체제도는 100만원 이상의 돈을 송금할 때 30분 후부터 인출이 가능하도록 한 제도로 2015년에 도입됐다.

인출 지연을 피하기 위해 B씨 사례처럼 피해자가 직접 돈을 찾아 냉장고에 보관해두라고 하거나, 금감원 직원 등을 사칭한 사람을 만나서 돈을 직접 건네라고 지시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전화 추적을 막기 위해 스마트폰 메신저의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걸어온 사례도 있다. 날로 발전하는 보이스피싱의 ‘창’이 정부의 ‘방패’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더 강력한 보이스피싱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간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3조원에 이르는 중국은 지난해 12월부터 송금 뒤 24시간 동안 인출할 수 없는 지연이체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에선 피해자의 77%가 65세 이상 고령층인 점을 감안해 일부 은행이 노인들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송금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일반 고객의 불편 등을 이유로 더 강력한 대책의 도입을 주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의 전화번호 조작을 막을 수 있는 대책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전화가 중국 등에서 걸려왔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어도 피해를 막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2015년 4월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발신번호 조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사기범들은 금감원 전화번호(1332) 등으로 발신번호를 조작하고 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발신번호 조작을 어떻게 막느냐에 따라 보이스피싱 피해 규모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