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불은 ‘스위시’로 해주세요. 신용카드보다 편해서요.”
스웨덴 스톡홀름 남쪽 역 앞의 노상에서 잡지를 파는 노숙인 라스(73)씨는 웃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스위시는 스웨덴의 대형 6개 은행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스마트폰 결제 어플리케이션(앱)이다. 라스 씨 목에 건 카드에 적힌 휴대전화 번호에 메시지를 보내면 지불 완료다.
한편 근처에서 구걸을 하는 A(48)씨 앞에 놓인 종이컵에 스웨덴 화폐 크로나는 하나도 없었다. A씨는 “요즘엔 현금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아요. 외국인이 주는 유로에 의존하고 있어요”라고 공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신용카드나 스마트폰 결제 등이 늘면서 현금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스웨덴은 현금이 가장 빨리 사라지고 있는 나라다. 구걸하는 이들 앞에 놓인 구걸 상자에는 현금이 눈에 띄게 줄었고 교회 헌금도 앱으로 한다. 은행을 습격한 강도는 정작 현금이 없는 은행에 당황해한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현금이 사라지고 있는 스웨덴 현지 모습을 27일 전했다.
스위시는 2012년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휴대전화 번호와 은행 계좌를 연동시켜 상품 구매나 개인 간 돈 거래를 간편하게 만들었다. 스웨덴 국민 절반 이상이 사용하고 있으며 19세에서 23세까지 청년들의 이용률은 95%에 이른다.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2015년 스웨덴에서 이뤄진 결제의 80%가 디지털로 이뤄졌다.
한 빵집에는 아예 “현금 사절”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이 빵집의 점원 이사벨(21)씨는 “돈을 만지지 않으니 빵을 좀 더 위생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은 2015년 크로나 지폐 디자인을 바꿨지만 이사벨은 바뀐 디자인을 알지 못한다. 그는 “1년 반 넘게 현금을 사용하지 않아서 디자인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금 없는 사회에선 교회의 모습도 변한다. 일요일 오전에 찾은 교회 입구에는 헌금처로 스위시 번호를 적은 카드가 가득했다. 담당자는 “스위시를 통한 헌금이 늘었다”고 말했다. 버스나 지하철의 발권기에서도 대부분 현금을 쓸 수 없다. 택시운전사 B(52)씨는 “현금을 내는 사람은 외국인 여행자 정도”라며 웃었다.
은행도 달라졌다. 현금인출기(ATM)이 철거되는 중이고, 절반 이상의 은행이 현금을 취급하지 않는다. 현금 없는 지점을 습격한 강도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달아난 사건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하지만 IT 기술에 익숙지 않은 노인들은 불편함을 호소한다. 스톡홀름 교외의 노상에서 수제 장갑을 팔고 있는 연금수급자 비테(68)씨는 “현금을 받고 싶지만 현금을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가운데 릭스방크는 디지털 화폐인 ‘e크로나’의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 스위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중앙은행이 자체적으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국민들에게 제공하려는 시도다. e크로나 프로젝트 담당자인 에바 유린씨는 “디지털 통화는 우리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 스웨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