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낙태죄 폐지’ 국민 청원과 관련해 “내년에 임신중절 실태 조사를 시행해 현황과 사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겠다”며 향후 낙태(임신중절) 문제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진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또 여성에게만 낙태죄의 책임을 묻는 현행 법제와 여성의 자기결정권·생명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청와대는 26일 오후 청와대 홈페이지와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낙태죄 국민 청원에 대한 답변을 공개하며 이같이 밝혔다. 답변자로 나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형법상 ‘낙태’라는 용어의 부정적 함의를 고려해 낙태 대신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절’이라는 표현을 쓰겠다”고 밝히며 해당 이슈가 예민한 주제라고 전제하며 답변했다.
조 수석은 “태아의 생명권은 매우 소중한 권리”라면서도 “처벌 강화 위주 정책으로 임신중절 음성화 야기, 불법 시술 양산 및 고비용 시술비 부담, 해외 원정 시술, 위험 시술 등의 부작용이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현행 법체계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현행 법제는 모든 법적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고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완전히 빠져있다”며 “여성의 자기결정권 외에 불법 임신중절 수술 과정에서 여성의 생명권, 여성의 건강권 침해 가능성 역시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밝혔다.
내년부터는 8년 만에 정부 차원의 임신중절 실태조사를 재개한다. 조 수석은 “내년에 임신중절 실태 조사를 시행해 현황과 사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겠다”며 “그 결과를 토대로 관련 논의가 한 단계 진전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임신중절 실태조사는 과거에 5년 주기로 진행됐으나 2010년 조사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정부 차원의 임신중절 관련 보완대책도 추진될 예정이다. 보다 체계적인 청소년 피임 교육과 여성가족부 산하 건강가정지원센터 전문 상담이 시범적으로 더 강화될 계획이다. 아울러 비혼모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을 구체화하고, 국내 입양 문화를 정착하는 등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이날 청와대의 답변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국민 청원 가운데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추천을 받은 청원’에 대해서는 30일 이내에 청와대 수석이나 각 부처의 장관 등 책임 있는 관계자가 답변하도록 한 방침에 따른 것이다.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 제안은 지난 9월 30일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고, 마감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22만여 명이 참여했다. 26일 현재까지 23만5372명의 동의를 얻었다.
해당 청원 게시물은 “낙태죄 폐지를 청원한다”며 “대한민국은 저출산 국가지만 원치 않는 출산은 당사자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현행법은 여성에게만 죄를 묻고 처벌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책임을 묻더라도 더 이상 여성에게만 ‘독박’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에 대해 “현재 119개국에서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을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 약은 12주 안에만 복용하면 생리통 수준과 약간의 출혈로 안전하게 낙태가 된다”고 했다. 이어 “낙태죄를 만들고 낙태약을 불법으로 규정짓는 것은 이 나라 여성들의 안전과 건강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국민들이 제대로 된 계획에 의해 임신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게 될 때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출산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한국과 일본, 이스라엘, 칠레, 영국 등 9개국을 제외한 25곳에선 임신부의 요청에 따라 낙태가 가능하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합법적인 낙태를 여성의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선 낙태죄가 형법 제269조에 명시돼 있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시술을 받으면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의 처벌을 받는다. 모자보건법상 낙태시술은 정신장애, 전염성 질환, 성폭행·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등 제한된 경우에만 허용된다.
이 때문에 법과 현실이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정부 연구조사를 보면 연간 17만~20만명이 낙태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낙태는 음성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날 답변에 나선 조 수석은 서울대 교수 시절인 ‘낙태 비범죄화론’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2013년 9월 학술지인 ‘서울대학교 법학’에 기고한 논문 ‘낙태 비범죄화론’에서 “모자보건법 제정 후 40년이 흐른 지금, 여성의 자기결정권 및 재생산권과 태아의 생명 사이의 형량은 새로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 수석은 또 “낙태 감소는 낙태의 범죄화와 형사처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시기부터 지속적, 체계적 피임교육, 상담절차의 의무화, 비혼모에 대한 사회·경제적 지원, 입양문화의 활성화 등 비형법적 정책을 통하여 가능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진성 신임 헌법재판소장도 낙태죄 폐지에 제한적인 찬성 의견을 낸 바 있다. 이 소장은 지난 22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낙태죄 폐지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질문에 “태아의 생명권과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조화시키는 방법이 있다”며 “미국 연방대법원이 했듯이 (임신 후) 일정 기간 내에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태아의 생명권에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사람도 임신한 여성일 수밖에 없다”며 “임신한 여성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낙태를 선택하게 될 수 있는데 그런 것을 태아의 생명권과 충돌하는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고 두 가지를 조화롭게 하는 방법이 있지 않으냐 (생각한다)”고 말했다. 헌재는 현재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