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구 목사(1875~1950)
충북 청주 태생. 1907년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서울 협성신학교 졸업. 서울 개성 춘천 홍천 가평 인제 원산 천안 진남포 용강 등에서 목회. 1919년 서울 수표교교회 당회장 부임 후 오화영 정춘수 목사 등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선언 당일 서울 태화관에서 일경에 연행돼 2년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또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옥살이, 1945년 5월 일본 전승 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해 옥살이를 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인 1946년 3월 1일 평양중앙방송 3·1절 기념방송 사건으로 북한 정치보위부에 연행됐고, 이듬해에도 진남포 3·1절 기념 강연 후 연행돼 옥살이를 했다. 그러다 1949년 ‘진남포 4·19사건’ 주모자로 체포돼 평남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10년 징역형이 확정돼 평양 인민교회소에서 복역 중 6·25전쟁 발발로 순교자가 됐다.
한편 33인의 한 사람인 고향 친구 정춘수 목사의 친일행위를 신 목사가 눈물로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한때 청주 삼일공원에 두 사람의 동상이 서 있었다. 하지만 정춘수 동상은 반민족행위자의 동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여론에 따라 철거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석구 목사의 삶은 사도 바울만큼 극적이다. 물질과 욕망에 휩싸여 살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구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은 다메섹 도상의 회심과도 같다.
‘독립운동가 신석구’는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했다.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그는 실천했다. 그가 회심을 했던 장소는 지금의 비무장지대(DMZ)에 위치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다. “내 백성을 찾겠다”고 고백했던 고랑포교회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흔적조차 없다.
옛 포구 고랑포. 지금도 포구 석축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무렵까지 고랑포는 교통요충지였다. 육로가 발달하지 않던 시절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고랑포는 숙박업이 발달했고 읍의 규모를 갖췄다.
지난 주말. 장남면 내 카페, 부동산 등의 업소마다 특별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1930년대 고랑포 풍경이다. 번화했던 고랑포의 영화가 되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에서 걸어 놓은 듯했다. 고랑포구를 중심으로 초가가 주를 이뤘고 듬성듬성 기와집과 양철지붕집이 보였다. 초가집에 걸린 간판이 보였고, 초가 사이로 전봇대도 서 있다.
이 흑백 사진에 누군가 컴퓨터 작업을 통해 여관 문방구 우체국지소 약방 시계포 면사무소 곡물검사소 금융조합 우시장 화신백화점 등의 위치를 기록해 놨다.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은 당시 주요 도시에 직영 연쇄점을 열었다. 이 사진을 연천군도 공인한 것으로 보아 향토사가들의 노력으로 보인다.이 사진이 그저 일제강점기 희귀사진일지 모르나 신석구 목사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사료가 됐다.
부모의 죽음 이후 ‘타락’
1907년 뼛속 깊은 유교 신봉자 신석구가 고향 청주를 떠나 이 낯선 땅에 발을 딛는다. 일본이 대한제국과 1905년 을사5조약을 체결, 외교권을 빼앗은 직후였다. 백성은 국권회복운동 민중계몽운동 국채보상운동 의병운동 등으로 저항했다. 이 무렵 교계도 윤치호 전덕기 등의 기호지방 크리스천, 안창호 이승훈 등의 서북지방 크리스천 등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힘의 한계를 느낀 교계는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려 볼 수밖에 없다고 믿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상징되는 부흥운동을 시작한다.
신석구는 쇠락한 유학자 집안 2남3녀 중 차남이었다. “옳은 사람이 되기 위해 3년간 ‘소학’을 무릎 꿇고 구도하는 자세로 읽었다”고 간증하곤 했다. 그러나 15세 이전 조부모, 부모, 큰아버지를 내리 잃고 삶에 깊은 회의를 갖는다. 유교 법도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 바빴다. 25세 때는 형도 잃었다.
그는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방황하며 보냈다. ‘자서전’에서 ‘표랑 생활 10년’이라고 했을 정도로 정신과 육체가 방종했다. 죽음의 실체를 겪은 소년의 걷잡을 수 없는 내적 상처였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예수 믿기 전의 방탕함을 고백하고 회개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열다섯 살부터 제일 음탕한 시골에 가서 있게 됐다. … 혈기가 결렬하여 움직이기 쉬운 소년의 마음은 마침내 죄에 빠지게 됐다. 19세 되던 10월 어느 날이다. 그 지방 풍속에 상류계급이 하류계급에 대하여는 유부녀라도 간음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5개월간 죄악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의 ‘1차 타락’이었다. 그는 20세 되던 해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도덕서)을 읽고 5개월간의 생활이 큰 죄악임을 깨달아 평생에 다시는 이런 일을 아니하리라고 맹세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23세에 장가든 그는 ‘2차 타락’을 한다. ‘마음에 이상한 충동을 받아 세상을 비관하고 신세를 한탄하는 중에 다시 타락의 길을 밟게 되었다. 하나님이여 나의 젊어서 지은 죄를 기억하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의 평전에 따르면 “신석구 목사가 훗날 후배 목사들에게 ‘젊어서부터 부부의 정이 너무 없어서 아내가 죽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데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견해가 설득력 있다.
이후 한학 재주로 군수집 아이를 가르치게 된다. 친구들이 “한밑천 잡고 오라”고 유혹했다. 한말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도덕적 결핍이었다. 이에 대해 신석구는 ‘(지금까지) 한 가지 양심을 지켜온 것은 재물에 대하여는 범죄치 아니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형마저 죽자 다시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3차 타락’을 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착한 사람은 복 받고 악한 사람은 벌 받는다는 말에 속았다. … 그때부터 기회만 있으면 양심의 가책까지도 눌러가며 기탄없이 행하였다’고 적을 만큼 세상적으로 비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꿈을 잃어버린 청년이었다.
그를 방황에서 끌어 낸 것은 친구 김진우였다. 신석구는 청주 유지 출신 자제인 그와 전당포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5년 만에 파산했다. 신석구는 친구를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3개월 만에 출옥, 거짓 사망신고를 내고 고향을 떠나 방랑했다.
그는 방랑 중 어느 날 밤 주막집에서 여인의 유혹을 받는다. 마음만 먹으면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정욕이 불 일 듯이 했고 양심이 이를 누르는 싸움을 했다’며 ‘다시 생각하면 모세의 시신으로 인하여 천사와 마귀가 싸우니 … 천사와 마귀가 나의 영혼으로 인해 싸운 밤인 줄 믿는다. …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영영 멸망에 들어갈 뻔하였다.’
신석구는 이후 김진우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전직 도사(都事) 윤자정 자제 훈장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한데 김진우가 ‘약장사’가 돼 있었다. 아니 정확히 약장사를 하는 전도인이 돼 있었다.
그는 고랑포에서 약국을 한다는 김진우를 따라갔다. 김진우는 고랑포에 이르러 “예수님을 믿어보게”라고 말했다. 고랑포약국의 목적은 전도소였던 셈이다. 약국 앞은 고랑포교회였고 약국 주변으로 속장, 유사(재정관리 집사) 등이 살았다. 교인들이 신석구에게 복음을 끊임없이 얘기했으나 그는 유교적 지조를 지켰다. ‘주님을 믿으라고 권할수록 내 마음이 굳어졌다. 유교에 습관화되어 유교 외에는 이단시한 까닭이다. 세 달 동안 권면하여도 (예배당) 구경조차 가지 아니했다.’
죄 고백 후 반듯한 삶 실천
고랑포교회는 미국 남감리회가 1900년 전후 세웠다. 남감리회는 서울과 개성, 강원을 선교 권역으로 두었다. 고랑포교회는 중간 기지였다.
“자네가 주를 믿지 아니하겠거든 자네가 정말 죄가 없는가 생각하여 보게.”
고랑포구에서 술을 마시는 그에게 친구가 말했다. 그는 생각했다. 50여 가지가 넘었다. “그래, 난 죄인일세.”
그는 한 발짝 말씀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전도인의 내방을 받고 신약성서를 읽었다. 회심의 구절은 이러하다고 고백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이르러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알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노라 … 예수교가 우리 유교를 폐하러 온 줄로 알고 내가 적대시한 것인데 우리 유교도 무슨 불완전함이 있어 완전케 하려나, 무엇을 더 완전케 할 것이 있나 하여 스스로 묻고 답하기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그는 고랑포 회심을 했다. 고랑포교회 초대교인 이덕수(1873~1909)가 그를 이끌었다. 고랑포 읍내 건달이었던 이덕수의 변화는 신석구에게 충격이었다. ‘어찌하여 유교에서 사람 되게 못하는 것을 예수교에서는 하는가.’ ‘지금 우리는 죄악이 가득하다. 주색잡기하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나.’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예수 믿어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아야 한다.’
그는 고랑포에서 개종과 동시에 전도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죄악에서 사람을 건져내는 것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는 신념은 이때 생겼다.
그 회심의 장소 고랑포의 11월은 이미 겨울이다. 곳곳에 ‘지뢰’라는 경고문이 오늘의 현실을 실감케 했다. 신석구 목사는 북녘 땅에서 ‘예수 믿는 국민을 찾다가’ 순교했다. 1950년 11월 평양 교외 비류강가에서였다. 비류강도, 임진강도 여전히 흐르는데 남북은 막혔다. 고랑포·청주=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