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6시45분 서울 마포구 홍익대부속여고 앞.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목도리를 꽁꽁 싸맨 할머니 12명이 올해 수능을 보는 고3 만학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생학교인 일성여자중고등학교 학생인 이들은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6시30분부터 모여 따뜻한 커피를 준비했다.
7시15분쯤 ‘힘내라’는 응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학교 고3 이수련(62)씨가 교문 앞에 도착한 것이다. 평생의 꿈이었던 수능을 보게 된 그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자궁내막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이 나이에 공부해서 뭐하나, 건강이 우선인데’라는 생각에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수능을 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도전했다”며 “수능은 내게 그 자체로 ‘꿈’이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40여명 할머니 응원단의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25분 뒤인 40분쯤 도착한 이명순(86) 할머니는 이번에 수능에 응시한 일성여중고 175명 만학도 중 최고령자였다. 그는 “중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이 항상 마음에 남아있었다”며 “수능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돼 고맙다”고 말했다. 응원 나온 일성여중고 만학도들은 이씨와 포옹을 나누며 격려했다.
곧이어 도착한 안금석(52)씨는 중국동포였다. 안씨는 “딸이 중국에서 대학시험을 칠 때 그 맘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 맘이 온전히 이해가 되는 기분”이라며 웃었다. 수능에 앞서 구체적인 포부도 밝혔다. 그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어렵게 살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보면 항상 맘이 아프다”며 “한국에 사는 재중동포들의 열악한 삶을 보고 사회복지사가 돼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꿈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도 할머니응원단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고사장으로 들어섰다.
할머니 응원단의 열기는 수능 응원 나온 어린 학생들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만학도 할머니들은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라는 구호를 외치며 수능 치는 학우들을 응원했다.
서대문구 가재울고 1학년 권가인(16)양은 “우리도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일찍 나왔지만 할머니들은 더 대단하신 것 같다”고 감탄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응원을 준비했다는 일성여중고 고2 정무순(68)씨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벌써 3번째 수능응원을 왔다”며 “내년에 우리가 이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렌다”고 말했다.
만학도 할머니들은 지진피해를 본 포항의 수험생들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일성여중고 고2에 재학 중인 이순희(63)씨는 “지진 때문에 애기들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며 “걱정 말고 시험을 잘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수련씨도 고사장에 들어가기 앞서 “지진으로 수능을 미룬 건 잘한 일”이라며 “어린 친구들이 걱정 속에서 수능 보는 게 마음이 아파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 보기를 계속 기도해 왔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사진=이병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