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종 교수의 하루… “1년에 200번 헬기, 밥도 못 먹어”

입력 2017-11-23 17:45 수정 2017-11-23 17:51
MBC 스페셜 캡처

2012년 9월 17일에도 이국종 교수는 발로 뛰고 있었다. 그해 11월 방영된 ‘MBC 스페셜’에서 중증외상센터 의사로서의 삶을 보여준 그는 그날 음주운전 차량에 치인 택배기사를 구하러 갔다.

“태풍 분다니까 아무도 못 태우겠다. 김 선생하고 나하고만 가자.” 응급 용품을 어깨에 둘러메고 폐부터 가슴, 복부 아래, 골반까지 모두 으스러진 환자를 구하러 의료진들은 태풍이 궂은 이날에도 어김없이 닥터헬리에 올라탔다.

교통사고, 추락사고, 자상과 같은 중증환자들에게 사고 후 1시간은 생사를 가르는 ‘골든아워’다. 13일 공동경비구역(JSA)으로 귀순한 북한 병사 역시 헬기 안에서 주한 미8군의 더스트 호프팀 장병들이 빠르게 응급처치를 한 덕에 병원에 도착하는 30분의 시간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만큼 환자를 헬기 안에서부터 응급 처치하는 것은 아주대 경기 남부 중증외상센터 의료진들과 이국종 교수에게는 일상이다.

중증외상이란 교통사고, 추락 등 일반 응급실에서의 처치 범위를 넘어서는 다발성 골절, 출혈 등을 말한다. 권역외상센터는 외상환자가 왔을 때 10분 이내에 처치할 수 있도록 외상외과, 신경외과, 응급의학과 등으로 구성된 전문 외상팀이 365일, 24시간 상주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환자의 소생, 초기 처치, 응급시술까지 통합적이고 필수적인 치료를 즉각적으로 제공한다.

“살려야죠, 살려야 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중증외상환자들의 수술을 담당하는 이 교수는 주말도 휴일도 없이 일한다. 36시간 연속으로 밤새워 일하고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36시간 연속으로 일하는 생활을 수년째 이어가고 있다.

1년에 200번 닥터헬리로 환자를 이송하고, 헬기 안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해내며 과중한 노동과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이 교수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2014년 세월호 사고 현장에 갔다가 오른쪽 어깨가 부러졌고, 왼쪽 무릎은 헬기에서 뛰어내리다 꺾여서 다쳤다.

2년 전 직원건강검진에서는 왼쪽 눈이 실명된 사실을 발견했다. 망막혈관 폐쇄와 파열로 80대 당뇨병 환자가 걸리는 병이다. 이마저 관리를 하지 않으면 오른쪽 눈에도 발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알고 있어도 생활 패턴을 바꿀 수가 없다. 이런 이국종 교수의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태풍이 몰아치던 2012년 9월 17일, 의료진들은 애타게 닥터헬리를 기다렸다. 폭우의 위험을 뚫고 헬기가 도착하자 재빠르게 올라탔다. 택배 일을 하던 중 중앙선을 침범한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한 환자는 근처 병원에 갔으나 수술할 수술실이 없어 이곳에 도움을 청했다.

교통사고를 당해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진 상태의 환자. 병원에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에 의료진은 가장 빠르게 찾아갈 수 있도록 헬기를 탔다. 병원이 있는 수원에서 환자가 있는 오산까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환자의 골든타임을 확보했다.


의료진은 닥터헬리에 탄 환자의 기도를 확보하고 혈압을 잡았다. 혈압이 잡히지 않았다. 혈압이 잡히지 않는다는 건 생명이 몹시 위태롭다는 뜻이다. 병원에 도착한 환자에는 곧바로 수술이 들어갈 수 있도록 빠른 조치가 이어졌다. 환자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여러 장기에서 출혈이 심해 수혈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환자의 CT를 찍은 의료진은 빠르게 수술방을 확보했다.


“얼굴뼈도 부서지고 폐 양쪽에 다 부서지고 내장, 골반, 그리도 대퇴골 밑에 정강이뼈까지 다 부서진 겁니다.”

환자 수술에 들어가기 전 이국종 교수는 손을 닦으며 환자를 어떻게 수술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피가 멎을까. 어떻게 하면 좀… 절제해내는 장기를 최소화할 수 있을까.”

그렇게 환자가 병원에 도착한 지 15분 만에 수술이 이뤄졌다.


이 교수는 환자를 겨우 살려 응급수술실에 들어가 긴 수술을 마쳤다. 수술이 끝나도 환자가 살아날지는 장담할 수 없다. 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워지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이렇게 끌고 가는 데 한계가 있어요. 더 못 끌고 가게 되면 돌아가게 되실 수 있어요.”

2012년 공사장에서 일하던 중 2층 높이에서 떨어져 내장과 골반을 다친 일용직 노동자 박모씨의 보호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천명의 중증외상환자들을 수술해온 그에게 이 어려운 한마디 역시 안타깝게도 일상이다. 보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발 선생님… 부탁드릴게요.”

수술이 끝난 중증외상외과 수술실의 모습

“우리는 사람이 할 일을 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의 힘으로, 의학의 힘으로 할 일을 다 하는 거고, 최종적인 결과는 어떤 때는 우리가 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만 다 하는 거죠.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죽거나, 살거나. 중증외상환자는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의 모습으로 수술방을 나간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의사는 최선을 다해 죽음과 싸워야 하고, 적어도 손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허무한 죽음을 맡게 해선 안된다”고 이 교수는 믿는다.


수술이 끝난 이국종 교수는 밥을 먹을 시간도 확보하지 못한다. JSA 귀순병 2차 수술 다음 날인 16일 낮 아주대병원 구내식당에서 동아일보가 바라본 이 교수는 여전히 파란색 수술 모자를 쓰고 있었다. 수술에 방해될까 봐 손목시계에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손목시계 밴드와 버클 부분을 의료용 테이프로 감아 놓은 것이다.

구내식당에 도착한 이 교수는 쉬지 않고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함께 밥을 먹던 간호사는 “체력을 보충하려면 (단백질 중심으로) 먹어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주로 고기와 계란 프라이를 먹고 있었다. 그때 한 간호사가 달려와 귓속말을 하자 이 교수는 절반 넘게 밥이 남아 있었지만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이국종 교수의 하루는 여느 중증외상센터 의료진들의 하루와 비슷하다. 2011년 아덴만 사건 당시 소말리아 해적 총격을 받은 석해균 선장을 기적적으로 살려내 ‘영웅’으로 칭송받던 그는 이번 JSA 귀순병을 살려내며 또 다시 칭송받았다. 권역위상센터에 대한 찬사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 교수는 22일 브리핑에서 논란에 대한 “자괴감”과 중증외상센터의 열악한 현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북한 군인이 한국에 살면서 기대하는 삶의 모습은 자기가 위험한 일을 당해 다쳤을 때 30분 내로 중증외상센터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고, 병원에 도착하면 골든아워에 치료가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런 곳에서 살기 위해 (남측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한다.”

2012년 이후 지금까지 복지부는 전국에 16개 권역외상센터를 선정했으나 이 중 9곳만이 운영되고 있다. 권역외상센터의 숫자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권역외상센터의 필수 충족요건인 전담외상인력도 많이 부족하다. 아주대 의료진들의 숨 막히는 하루에서 단번에 드러나듯 확보된 전담인력에 대한 처우 역시 매우 열악한 상태다.

(사진=뉴시스) 이국종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이 22일 오전 경기 수원 아주대학교병원 아주홀에서 브리핑을 취소한 뒤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외상으로 인한 사망 중 적절한 치료가 이뤄졌다면 생존할 수 있었을 ‘예방 가능 외상사망률’은 2010년 기준으로 35.2%에 달한다.

이 교수는 22일 “한국에 살다가 사고가 났는데 정작 그때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갈 곳이 없고, 전화 한 통 할 데가 없어서 응급실에 깔려 있다가 허무하게 생명을 잃는다면 왜 넘어왔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이어 “우리가 만들어야 할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다.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박세원 기자 sewon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