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 1090원선이 무너졌다. 북한 리스크 등 악재가 해소되고 수출 호조로 국내에 달러가 계속 유입되면서 원화 가치가 거침없이 오르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당분간 하락세(원화 강세)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전문가들은 현재 환율이 수출 경쟁력을 크게 훼손할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하락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급격한 하락은 국내 수출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미국이 한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개입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외환 당국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22일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6.7원 내린 1089.1원으로 마감했다. 1090선이 무너지기는 2015년 5월 이후 2년6개월여 만이다. 원화 가치 상승세는 가파르다. 달러화 대비로 지난 9월 말 이후 2개월도 안 돼 4% 이상 올랐다.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 등 주요국 통화는 같은 기간 0.1% 수준으로 올랐다.
상승세의 배경은 긍정적이다. 글로벌 경기가 회복되면서 신흥국 자산 선호현상이 높아졌다. 수출도 계속 호조다. 원화 강세가 미치는 긍정적 요인도 있다. 수입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물가가 내려가면서 내수 부양 효과를 볼 수 있다. 외국인들이 환차익을 노리고 한국 주식·채권 등에 투자할 수 있다. 하나금융투자 김두언 선임연구원은 “원화 자산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다는 게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상승세가 너무 빠르다.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부품이 내년에 본격적 가격 경쟁에 돌입하면 부담이 커진다. 일본 엔화 가치는 떨어지고 있어 가격경쟁력에서 밀릴 수 있다. 지나치게 빠른 환율 하락은 외국인의 단기 투기 자금이 유입될 가능성을 높인다. 연세대 경제학부 김정식 교수는 “외국인은 한국 외환 당국이 시장 개입을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며 “단기 자금이 들어왔다가 갑자기 빠져나가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당장 당국의 개입이 필요한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원·달러 환율은 2014년 중순쯤에도 1010원선에서 움직였었다. 수출물량이 꾸준히 늘고 있어 환율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다. 한양대 경제학부 하준경 교수는 “한국의 수출은 환율보다 세계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본적으로 1000~1200원에서 움직인다면 한국 기업이 대응할 만한 체력은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환율이 더 떨어져도 대응할 방안이 많지 않다. 정부가 달러를 사들이는 ‘스무딩 오퍼레이션’(미세조정)은 가능하지만 방향성을 바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현욱 거시경제연구부장은 “한국은행이 기준금리까지 인상할 경우 환율 하락 압력은 더 거세질 것”이라며 “통화정책을 고려해 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