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피고인들에 대한 1심 선고가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 유죄 판결이 내려진 가운데, 재판부마다 하나같이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했다”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받아들였다. ‘재판 보이콧’으로 박 전 대통령 공판이 지연된 상황에서 그의 유·무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재판에서 잇따라 박 전 대통령을 ‘공범’으로 판시한 것이다. 아직 판결문에 ‘공범 박근혜’로 등장하고 있는 그가 결국 ‘주범 박근혜’가 될지 주목된다.
◇ 朴정부 ‘문화대통령’ 차은택… “朴과 공모해”
“최순실씨,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공모해 KT 황창규 회장을 압박해 이동수씨의 채용, 보직변경을 하도록 하고 플레이그라운드를 광고대행사로 선정하도록 했다는 강요 혐의가 충분히 유죄로 인정된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부장판사 김세윤)은 22일 박 전 대통령과 공모해 KT에 광고대행사 선정 등을 강요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창조경제추진단장 차은택씨에게 이같이 선고하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차씨가 최씨에게 지인 이씨가 대기업에 채용될 수 있도록 부탁했고,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안 전 수석이 황 회장에게 전화해 “VIP(박 전 대통령) 관심사항”이라며 이씨의 채용을 요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또 이씨가 채용된 뒤에도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안 전 수석이 KT 광고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맡겨달라고 한 사실도 인정했다.
플레이그라운드의 광고대행사 선정 과정에서도 안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최씨가 설립한 플레이그라운드를 KT 광고대행사로 선정할 것을 요구한 사실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대통령, 경제수석의 요구를 받은 기업이 느낄 수 있는 압박을 이용해 기업 경영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했다”며 “인정된 피고인의 죄책이 대단히 중해 책임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 朴의 ‘문고리’ 정호성… “朴과 공모해”
“최순실씨 의견을 듣기 위해선 문건을 최씨에게 보내 살펴보게 하는 것이 당연한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도 문건이 최씨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은 지난 15일 박근혜정부 당시 청와대 기밀 문건을 ‘비선실세’인 최씨에게 유출한 혐의(공무상 비밀누설) 등으로 기소된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1심 재판에서 이같이 말했다.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 전 비서관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하며 박 전 대통령의 공모관계도 인정한 것이다. 판례에 따르면 공모관계는 암묵적으로라도 범죄를 실행할 의사의 합치가 있으면 성립한다.
박 전 대통령의 지난해 10월 25일 대국민사과도 증거가 됐다. 재판부는 “정 전 비서관이 대통령의 포괄적·묵시적 지시가 있었다고 진술했고 박 전 대통령도 대국민사과에서 대통령 취임 후 일정 기간 동안 일정 자료를 최씨에게 보내 의견을 들은 바 있다고 인정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정 전 비서관에 대해선 “정 전 비서관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고도의 기밀유지가 요구되는 문건을 장기간 반복적으로 최씨에게 유출했다”며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국정농단 단초를 제공해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줬다”고 밝혔다.
◇ ‘세기의 재판’ 이재용… “朴과 공모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씨와 오랜 친분관계가 있다는 점,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에게 최씨 딸 정유라씨를 언급한 점, 승마지원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점, 최씨의 독일생활을 직접 챙긴 점 등을 종합하면 둘 간의 공모관계를 충분히 인정 가능하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재판에서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공모관계를 인정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는 지난 8월 25일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측에 433억 상당의 뇌물을 주거나 주기로 약속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 부회장의 1심 재판 판결문에서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이 부회장 뇌물공여 사건에 있어서 공모관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부회장 측은 뇌물이 아닌 강요에 의한 지원임을 강조하기 위해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제시한 증거 어디에도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직접 승마 등 뇌물사건에 관해 상의하거나 논의한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이 부회장 측은 승마 지원을 위해 제공한 금품이 박 전 대통령에게 가지 않은 상황에서 지원 행위가 죄가 되기 위해선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경제적 공동체’라는 점이 증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40년 지기인 최씨는 물론 그의 딸인 정씨와 친분 관계가 두텁다고 봤다. 이런 3자의 관계 하에서 박 전 대통령이 유독 승마에 관심을 피력하고 정씨를 챙긴 점을 뇌물사건 공모관계의 정황으로 판단했다. ‘경제적 공동체’ 주장에 대해선 공무원(박 전 대통령)과의 공모를 통해 비공무원(최씨)이 뇌물을 받게 되는 경우도 공동정범이 된다는 형법33조를 예로 들면서 “경제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 꼭 증명될 필요가 없다”고 판시했다.
◇ 진짜 “참 나쁜 사람”은 누구?
“박 전 대통령이 노태강을 사직시키라고 지시한 후 그 이행 경과를 계속 보고받고 승인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과 김상률, 김종덕 등 사이에 공범관계가 성립한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자 1심 재판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부장판사 황병헌)는 지난 7월 31일 박 전 대통령을 블랙리스트 사건의 공범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노태강 전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장(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에 대한 사직 요구 혐의에 대해선 김상률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과의 공범관계가 성립한다고 인정했다. 박 전 대통령의 범죄 혐의에 대해 최초로 인정하는 판결이었다.
노 차관은 2013년 체육국장 재임 시절 최씨의 측근인 박원오 전 대한승마협회 전무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상부에 보고해 박 전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으로 찍혔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으로 좌천됐다. 2016년에는 한국-프랑스 수교 130돌을 맞아 추진한 ‘프랑스 장식미술전’이 무산되자 지난해 3월 사표 제출을 강요받고 두 달여 만에 물러났다. 노 차관은 당시 박민권 전 문체부 1차관 등으로부터 “대통령이 전시회를 방문하고 싶어 하는데 (무산됐으니) 책임져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압력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박 전 대통령 지시로 노 차관에게 사직을 강요한 혐의로 기소된 김 전 수석과 김 전 장관은 재판 과정에서 공무원에 대한 임면권자인 대통령이 공무원에게 사직을 권유하는 것은 권한 범위 내의 행위이므로 직권남용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상관인 박 전 대통령의 지시가 그 자체로 위법·부당함이 명백하지 않은 이상 이에 복종할 의무가 있어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날 선고를 하면서 “대통령의 지시는 위법·부당한 지시임이 명백하다”며 “헌법과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신분이 보장되는 노 전 국장으로 하여금 의사에 반해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요구해 면직한 것은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직업공무원제도를 본질적으로 침해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