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국의 계단’(SBS·2003)의 어린 한정서. 맑은 눈을 가진 그 아이를 기억하시는지. 춤추고 노래하길 좋아해 가수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연기의 매력에 눈을 뜬 이후 그 길로 직진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된다’는 쾌감이 그를 이끌었다. 박신혜(27)는 그렇게 15년을 배우로 살아왔다.
작품을 고르는 심미안(審美眼)이라도 있는 걸까. 안방극장에서 그는 시청률 무패 행진을 이어왔다. ‘미남이시네요’(2009) ‘상속자들’(2013) ‘피노키오’(2014) ‘닥터스’(이상 SBS·2016)…. 그가 출연했다 하면 흥행은 떼놓은 당상. 이름 석 자 앞에 ‘한류스타’ 타이틀이 붙게 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반면 영화에서는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다.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상의원’(2014) ‘형’(2016) 등에 꾸준히 출연했으나 결과는 매번 신통치 않았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흥행 면에서 성공을 거둔 ‘7번방의 선물’(2013) 정도를 들 수 있겠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의 온도차는 배우 본인에게도 적잖은 골칫거리인 모양이다. “제가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해요. 극복하겠다는 것보다는 스스로 받아들여야 할 숙제인 것 같아요.”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신혜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자신의 속이야기를 털어놨다.
그런 그에게 ‘침묵’(감독 정지우)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재벌총수 임태산(최민식)이 약혼녀 유나(이하늬)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딸 미라(이수경)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벌이는 이야기. 극 중 박신혜가 연기한 인물은 미라의 변호사 최희정. 대선배 최민식과 호흡이 쉽지 않은 도전으로 다가왔을 법하다.
이승환의 ‘꽃’ 뮤직비디오 출연을 계기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박신혜는 중2 때부터 본격적으로 연기에 빠져들었다. “다른 인물이 되어서 그를 표현하는 게 굉장히 새로웠어요.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만 그 결과물이 나왔을 때 정말 행복해요.” 여전히 연기가 너무 재미있다는 이 배우를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침묵’이라는 영화에 끌린 결정적 이유는 무엇이었나.
“최근 나온 영화들은 대부분 ‘착한 놈과 나쁜 놈이 잡고 잡히는 싸움’이나 ‘개개인의 감정이 얽히고설킨 상황’이 다뤄지곤 하잖아요. 그런데 ‘침묵’은 범인을 찾는 즐거움에 감성적인 지점이 더해져 차별화된다고 생각했어요. 진실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가는 희정 캐릭터도 좋았고요. 에너지 넘치는 기존 이미지와 달리 이번엔 현실에 찌든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박해준 이하늬 류준열 이수경 등 선후배 배우들과 함께한 작업이었다. 특히 최민식과 맞붙는 신에서는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을 법한데.
“너무 떨렸어요. 전 원래 연기할 때 상대방 눈을 보면서 하거든요. 근데 (최민식 선배님은) 처음에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고요. 법정에서 USB를 증거로 내놓으라며 다가가는 장면에선 정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웃음). ‘아, 연기를 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뭔가 짜릿하더라고요.”
-촬영을 마치고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았던 지점이 있다면.
“쫑파티 때 현장스틸 기사님이 사진들을 다 모아서 슬라이드 비디오로 보여주셨는데 너무 뭉클한 거예요. 좀 더 열심히 할 걸, 후회도 되고…. 다른 분들은 현장이 놀이터 같다고 하시는데 저는 긴장의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선배님들과 붙는 장면에 우뚝 서야 했고, 스크린에 비치는 내 모습이 어색하진 않을까 긴장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컸으니까요. 그런데 사진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좀 더 즐겨도 괜찮았을 텐데, 왜 그렇게 긴장만 하고 있었을까.”
-‘상의원’ 이후 3년 만에 선보인 주연 영화다. 그동안의 행보를 돌아보면 스크린에서의 활약이 아쉬운 게 사실인데.
“드라마랑 번갈아가며 하다 보니 두 작품을 동시에 못 하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영화 선택의 폭이 좁아졌죠. 저는 경계 없이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스크린보다 브라운관에서 이슈가 많이 되다 보니 어느 정도 부담감이 있었어요. ‘상의원’이 너무 아쉽게 막을 내려 위축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고요. 그럴 때일수록 더 부딪혔어야 했는데, 그때는 몰랐던 거죠.”
-아무래도 드라마와 영화에 임할 때의 마음가짐이 조금은 다를 것 같다. 이를테면 ‘시청률 보증수표’로 통하는 안방극장에선 좀 더 자신감이 생긴다거나.
“전 제가 시청률 보증수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항상 ‘이 작품이 잘 될까’ 긴장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제게는 똑같이 도전이에요. 경계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둘 다 재미있거든요. 아직 해보지 못한 장르도 많고, 만나지 못한 배우도 많고…. 늘 새로운 경험이에요.”
-작품을 보는 눈이 남다른 것 같은데, 본인만의 선정 기준이 있다면.
“지금도 완벽하진 않아요. 작품을 하면서 잡혀가는 것 같아요. 그냥 읽다 보면 제 손에 들어오는 책(대본)이 있어요. 내가 잘해왔던 것이 아니라 조금 부족하더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이요. 아, 그리고 저는 마음에 콕 꽂히는 ‘한 신(scene)’을 믿어요. 촉이라기보다는, 드라마든 영화든, 손가락에 탁 걸리는 무언가가 있거든요.”
-일각에서는 이미지 변화가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대체로 건강하고 정의로운 캐릭터들을 연기해 왔으니까.
“보시는 분들께서 새롭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제 연기를 그만 보시지 않을까요? 그동안 제가 맡아 온 캐릭터들이 아픔을 딛고 일어나는 인물이라서 그런 모습을 인정하고 좋게 봐주시지 않았나 싶어요. 오히려 ‘내가 누군가의 삶을 대신 잘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싶다는 바람이에요.”
-작품 속 캐릭터 때문인지 ‘착하다’는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본인에게는 한편으로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텐데.
“에너자이저가 아닌 이상 저도 기계처럼 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남들과 똑같아요. 가끔 울기도 하고 화도 내죠. 건강한 이미지로 인해 스트레스를 안 받은 건 아니에요. 언제부턴가 나는 ‘바르게 살 것만 같은 사람’이 돼있더라고요. 저도 바(Bar)나 클럽에 가서 술 한 잔 기울이고도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쌓인 적도 있죠. 하지만 그보다는 (배우라서) 좋은 점이 많으니까 마음을 비우게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인터뷰에서 ‘단순히 한류스타로 남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했더라. 어떤 마음에서 한 말인지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
“한류스타보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배우가 되고 싶은 거죠. 연기뿐 아니라 한 여자로서도 잘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고요. 수식어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더 계속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해요). 근데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자로서 꿈꾸는 모습은 어떤 건가.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보면서 결혼을 꿈꿔왔어요. 제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다 보면 보는 눈도 생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인연으로) 이어가지지 않을까요(웃음)?”
-그러고 보니 딱히 열애설에 휩싸인 적도 많지 않은 것 같네.
“몰래 다 하죠. 근데 저는 굳이 공개 연애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적인 부분과 직업적으로 (대중에) 보여져야할 부분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냥 결혼할 때 발표할게요(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