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근(54·소방경·사진) 인천서부소방서 원당119안전센터장은 지난 20일 오전 10시45분 한통의 신고 전화를 받았다. 인천 서구 왕길동의 한 다세대 빌라에서 큰불이 났다는 주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신장암 수술을 받은 지 채 한 달이 안돼 몸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허리에 차고 있던 복대를 고쳐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정 센터장이 화재 현장에 도착했을 땐 불이 2~3층으로 번져있었고, 맹렬한 화염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정 센터장은 황급히 빌라 뒤편을 살폈다. 불이 건물 전면을 뒤덮고 있어 뒤편에 주민들이 대피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3층 복도 창틈으로 “살려달라”는 주민들의 외침이 들렸다. 이들은 불길을 피해 뛰어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이 때 한 주민이 “아이들이 있다”고 소리쳤다. 정 센터장은 주민들 사이로 5살 A양과 3살 B군 남매를 발견하고 곧바로 구조에 나섰다. 불길과 연기가 사나워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정 센터장은 사다리를 이용해 이들을 구조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 남매가 뛰어내릴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키가 1m 남짓한 남매가 스스로 뛰어내리기에는 난간은 너무 높았다. 정 센터장은 함께 대피해 있던 주민들에게 남매를 아래로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4m 높이에서 떨어지는 남매를 맨손으로 무사히 받아냈다.
정 센터장은 “현장에 도착해서 봤더니 3층에서 주민들이 뛰어내리려고 하고 있었다”며 “아이들도 함께 있었는데, 사다리를 가져올 틈이 없어 맨손으로 받았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소방관 29년 차인 그는 “콘크리트 바닥에 아이들이 떨어져 다칠까봐 걱정했는데 무사히 구해내 무척 뿌듯하다”고 했다.
정 센터장의 활약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3층은 물론 5층에 대피해 있던 주민 8명을 직원들과 함께 달려가 무사히 구조해내기도 했다.
정 센터장에게 구조된 남매는 대피 과정에서 연기를 많이 마셔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외상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어린 남매와 빌라 주민들의 생명을 구한 정 센터장은 현장 출동 당시 지난달 25일 신장암 수술을 받아 허리에 복대를 차고 있었다. 11월 한 달은 회복을 위해 쉴 예정이었지만 2주 먼저 복귀해 귀중한 생명을 구했다. 그는 “병원에서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무리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당시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술받은 환자라는 생각보다 소방관으로서 할 일을 했을뿐” 이라고 겸손해 했다.
인천 서부소방서는 아이들을 구한 정 센터장과 함께 남매를 구하는데 도움을 준 주민을 찾아 유공 표창장을 수여할 계획이다.
정지용 기자 jy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