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 콩팥병(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중1 신영(가명)이는 집에서 매일 8∼10시간씩 복막 투석을 한다. 몸 속 노폐물을 걸러내는 콩팥(신장)이 망가져 인위적으로 빼내주지 않으면 곧바로 생명이 위태해질 수 있다. 배(복강)에 꽂은 관으로 하루 네 번씩 새 투석액을 넣고 빼낸 내용물을 교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신영이 엄마는 지난해 가을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투석 치료에 엄마의 도움은 필수다. 이 때문에 신영이는 1박이 넘는 학교 행사에 한 번도 참여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아이가 초등 6학년 수학여행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싶다고 떼를 써서 엄마가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엄마는 20㎏이나 되는 복막 투석 장비를 들고 경주까지 따라나섰다.
여행지에서 투석을 하고 결과를 수첩에 적던 중 엄마는 신영이의 복막 투석액이 평소보다 적게 배출된 걸 밤늦게 발견했다. 엄마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투석이 잘못된 건가. 응급 상황인가.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야 하나.’
경주에는 신영이를 응급조치할 수 있는 병원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서울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기 너머 의사 목소리에 의존해 직접 응급조치를 했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엄마는 응급조치하는 내내 비전문가인 자신이 실수해 딸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불안과 부담감을 떨치지 못했다.
투석 고통…멀기만 한 콩팥 이식
콩팥 기능 장애를 갖고 태어난 열두살 지호(가명)의 투석 치료는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국내에는 소아에게 투석 치료를 해 줄 수 있는 병원과 의료진이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지호에게 꼭 맞는 소아용 투석 필터는 아예 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경남 김해시에 살던 가족은 지호 치료를 위해 결국 소아 신장 전문의가 있는 서울로 병원을 옮겨야 했다. 엄마는 지호를 데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왕복 860㎞를 치료받으러 다니고 있다. 엄마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허리뼈 양쪽 복막(장기를 둘러싼 얇은 막) 뒤에 1개씩 자리 잡은 강낭콩 모양의 콩팥 무게는 130g 정도다. 소변을 만들어 몸 밖으로 빼내고 체액을 일정하게 유지·조절하는 중요한 일을 한다. 하지만 한번 기능이 나빠지면 정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콩팥이 3개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경우 만성 콩팥병으로 진단된다. 말기 상태가 되면 뇌사자의 콩팥을 이식받거나 하루라도 투석(복막·혈액)을 받지 않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신영이나 지호처럼 선천적 장애로 콩팥 기능이 나빠진 소아·청소년 환자들이 뇌사자의 콩팥을 이식받으려면 보통 4년(평균 46.2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4.5개월 걸리는 미국의 경우와 비교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하염없이 이식을 기다리며 매일 집에서 최대 10시간에 달하는 복막 투석을 받거나 1주일에 세 차례 병원을 방문해 4시간씩 혈액 투석을 받아야 한다.
더구나 아이들은 성장, 학습, 사회화 과정에서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성인보다 더하다. 하지만 소아 투석 치료와 콩팥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국내 여건은 미흡하다. 대한신장학회와 소아신장학회는 최근 국회에서 ‘투석 환자 관리체계 구축 및 건강권 증진’ 정책 토론회를 열고 이 같은 문제점의 개선을 촉구했다.
의사, 병원 찾아 ‘투석 난민’ 전전
20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대한소아신장학회에 따르면 지난해 만성 콩팥병으로 진료받은 소아·청소년은 729명이다. 이 가운데 말기여서 투석 치료와 콩팥 이식을 받은 인원은 250명으로 성인(9만3634명)에 비하면 극히 적다. 당뇨병 고혈압 등 만성질환의 증가로 그 합병증인 만성 콩팥병을 앓는 성인은 크게 늘고 있다. 반면 소아의 경우 어른과 달리 대부분 콩팥이나 요로계통의 선천적 기형으로 생기기 때문에 발병률이 크게 늘거나 하지는 않는다. 유병환자는 매년 700∼800명이다. 소아·청소년 치료 인프라에 정책적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다.
소아는 성인보다 체구가 작아 투석 방법이 어렵고 감염 등 합병증 위험도 높다. 그래서 전문 시설에서 전문의의 집중적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소아 신장 전문의는 전국 13개 도시(서울 성남 수원 고양 원주 청주 대전 전주 대구 광주 창원 부산 제주)에 50여명밖에 없다. 10세 미만도 투석 치료 할 수 있는 지역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제주 등 6곳뿐이다. 소아 전문 인력이나 치료재·장비를 갖추는 데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그에 따른 보상(진료 수가)이 뒷받침되지 않아 병원들이 선뜻 나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국의 어린이 투석 환자가 양질의 치료를 받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하일수 교수는 “먼 거리를 투석을 하러 다니거나 투석 때문에 이사를 해야 하는 이른바 ‘투석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소아·청소년 투석 환자의 81% 정도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복막 투석을 택한다. 혈액 투석의 경우 주 3회 병원을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아이들 성장에도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혈액 투석은 굵은 관을 혈관에 꽂아 피를 몸 밖으로 꺼내 투석기(인공 신장기)에서 노폐물을 거른 뒤 몸속에 다시 넣어주는 방식이다. 투석 장비가 커 병원에서 해야 한다.
복막 투석은 어린 환자들이 스스로 할 순 없기 때문에 치료 전 과정에 대한 책임을 부모가 떠안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의료진의 상시적 관리 감독을 받기 어려워 매번 잘 됐는지 확인이 안 되고 투석 과정에 문제가 생겨도 부모가 신속하고 정확히 대처하기 힘들다.
대한소아신장학회 유기환(고려대 구로병원 교수) 이사장은 “스스로 치료 행위를 할 수 있는 어른과 달리 아이들의 경우 보호자가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하기 때문에 치매 못지않게 간병 부담이 과중하다”면서 “자녀의 무한 투석에 따른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부담이 매우 크며 빈곤, 불화, 가정붕괴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초등생 투석 자녀를 둔 윤모(여)씨는 “보통 아이가 잠드는 밤에 투석하는데, 새벽에 투석 장비에서 경보음이 울리면 심장이 덜컥한다”면서 “집에서 의사와 노폐물 제거 정도 등 투석 결과를 소통할 수 있다면 응급 상황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을 텐데 그럴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고 털어놨다.
가정 투석 모니터링, 콩팥 이식 배려 필요
전문가들은 가정 복막 투석 치료의 질을 높이고 보호자 간병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가(在家) 모니터링 시스템’ 도입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투석 결과가 온라인으로 의료진에게 자동 전송되는 시스템으로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 의료진이 매번 치료 결과를 알 수 있고 투석이 잘못된 경우 빠르게 대처해 위급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국내에선 아직 합법화되지 않은 ‘원격 의료’의 틀에 묶여 도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문에 투석 환자 부모는 치료 결과를 매일 수첩에 기록하고 2∼3개월에 한 번씩 병원을 방문할 때 그간 치료에 문제는 없었는지 의료진 확인을 거치는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강희경 교수는 “소아 투석처럼 환자는 소수지만 의료진의 긴밀하고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한 경우부터 IT 의료기술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현재 비급여인 소아 투석 환자 체수분 측정 신기술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투석 치료의 고비용성을 감안한 별도의 ‘소아 투석 수가’ 신설 등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국제 수준에 맞게 뇌사자 장기 배분 기준을 개선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현재 소아 콩팥이식 대기자는 나이에 따라 가산점(만 11세 이하 4점, 만 12∼18세 3점)을 받는데 이는 18세가 되는 순간 없어진다. 강 교수는 “18세가 돼 가산점마저 제로(0점)가 됐다는 걸 알게 된 청년들은 막 사회에 진출하면서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면서 “소아 가산점은 18세가 지나도 유지되는 게 합리적이며 18세 미만 뇌사자 콩팥은 18세 미만 대기자가 먼저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는 기증자가 11세 이하인 경우 11세 이하 대기자 중에 선정해 배분하고 있다. 하 교수는 “소아 대기자는 성인에 비해 수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소아 우선권을 조금 더 확대해도 성인 대기자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경우 35세 미만 뇌사 기증자는 소아 대기자에게 우선권(Share35)을 주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투석 치료 중이면 18세 이상에도 가산점을 인정한다. 이들 국가에선 뇌사자 장기의 경우 소아·청소년에게 우선 배정해 반년 이상 투석 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
글=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