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짐바브웨는 지금 쿠데타 중이다. 군이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장악하고 로버트 무가베(93) 대통령을 가택연금했다. 좀 이상하지만, ‘37년 독재자’를 몰아내면서 이 나라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유혈사태 조짐은 아직 없다. 더 이상한 것은 무가베 대통령을 대하는 쿠데타군의 태도다. 그들은 여전히 극존칭을 붙인다. “His excellency, the president!” 우리말로 “대통령 각하!”쯤 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쿠데타 군부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쿠데타 발생 뒤인 지난 17일 무가베 대통령은 한 대학에 모습을 드러냈다. 학사모를 쓰고 졸업식 축사를 했다. 행진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그가 레드카펫을 걸어 연단에 오르자 참석자 수천명은 일제히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그의 정적인 야당 지도자 모건 창기라이는 무가베의 퇴진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기대와 감정을 고려해 그의 업적과 짐바브웨 독립 전후에 기여한 공로를 100% 존중하겠다.”
◇ 노인을 대하는 짐바브웨인의 자세
37년간 독재 통치를 하며 경제를 거덜 낸 지도자가 이런 대접을 받는 게 매우 이상했던지, 영국 BBC방송은 그 배경을 분석했다. 짐바브웨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비롯해 여러 요인을 살펴보다 찾아낸 것은 무가베 대통령이 무려 93세의 ‘노인’이란 이유였다.
아프리카 많은 지역에서 그렇듯 짐바브웨도 노인에 대한 존중과 공경이 사회와 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짐바브웨 최대 부족인 쇼나인들의 문화는 ‘오래 산 만큼 많은 것을 경험한 연장자의 지혜’를 핵심에 둔다. 노인에게 존경을 표하는 관습이 생활 구석구석에 자리 잡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집을 방문할 때는 그 집안 어른들을 일일이 거명하며 “건강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소년소녀들의 경우 노인들에게 이런 안부 인사를 할 때 무릎을 꿇거나 절을 곁들여야 한다. 자기보다 연장자에게 일일이 절을 하며 “건강하십니까”라고 묻는 과정이 관례에서 벗어날 경우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정교육이 잘못됐다”는 비판의 시선을 받게 된다. 한 집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갖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며, 이런 분위기는 그 집안을 넘어 지역사회와 국가로까지 확대돼 있다.
BBC는 “짐바브웨의 노인 존중 문화가 93세의 노(老)정치인이자 국가적 연장자인 무가베 대통령을 크게 도와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야당 지도자 창기라이가 무가베를 향해 “물러나라”고 요구하면서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예의를 갖춘 까닭도 이런 문화가 몸에 배어 있는 ‘국민감정’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젊은 부인의 야심’ 없었다면… ‘무가베 축출’도 없었다?
군부가 쿠데타에 나선 결정적 계기는 무가베 대통령이 최근 에머슨 므난가그와(75) 부통령을 경질한 조치였다. 므난가그와는 군부의 지지를 받으며 ‘포스트 무가베’ 지도자로 꼽혀 왔다. 무가베가 41살 연하인 부인 그레이스(52)에게 권력을 넘기려 므난가그와를 경질하자 반발한 것이다.
그레이스가 아니었다면 무가베는 임기를 마치는 것은 물론 다음 선거에도 나설 수 있었을지 모른다. 쿠데타 발발 직후 군부는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군의 행동은 무가베 대통령 주변의 범죄자들을 겨냥한 것이며 대통령을 향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부는 방송국 장악 직후 그레이스를 지지하던 정부 관료들을 체포했다. 이그네시우스 촘보 재무장관, 조나단 모요 교육장관 등이 붙잡혔다. 이들은 집권 여당 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의 그레이스 파벌인 G40의 핵심 멤버다.
짐바브웨는 198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무가베가 지금껏 집권해 왔다. 과거 독립투사였던 무가베는 권력을 잡자 6년 임기 무제한 연임의 대통령중심제 개헌을 통해 독재해왔다. 최근 정치적 동반자인 므난가그와 부통령 대신 아내 그레이스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려고 했다.
그레이스는 타이피스트 출신으로 87년 초대 총리였던 무가베를 만났다. 당시 무가베는 63세, 그레이스는 22세였다. 무가베에게는 독립투쟁 동료였던 아내 샐리가 있었기 때문에 불륜관계였다. 그리고 샐리가 숨진 후 96년 정식으로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경제가 최악인 상황에서도 그레이스는 남다른 명품 사랑으로 악명이 높았다. ‘구찌 그레이스’ ‘퍼스트 쇼퍼’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지난 8월에는 남아공에서 아들이 사귄 여성 모델을 폭행했다가 면책특권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등 잦은 구설에 올랐다.
그레이스는 무가베가 나이가 들면서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가베도 중요 사안을 결정할 때 그레이스에게 많이 의존했다. 가디언은 “그레이스는 짐바브웨의 비공식 총리”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레이스는 특히 올 들어 “내가 대통령직을 기꺼이 물려받을 것”이라며 남편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도록 요청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에 돌입했다.
◇ 대규모 시위… 퇴진 거부, 버티는 무가베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는 18일(현지시간) 무가베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재향군인회, 시민단체, 여당인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애국전선(ZANU-PF)’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군부도 집회를 지지했다.
거리는 무가베의 퇴진을 예상하며, 환영과 축하 분위기로 넘쳐났다. 군중은 "할 만큼 했다. 무가베는 물러나야 한다"고 외치며 노래를 부르고 경적을 울렸다. 현지 유력 일간지 1면에는 ‘궁지에 몰린 무가베'라는 헤드라인으로 그의 퇴진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실렸다. 치웬가와 므난가그와 전 부통령을 응원하는 포스터도 곳곳에 보였다.
콘스탄티노 치웬가 육군 참모총장 등 쿠데타 군부는 연금돼 있는 무가베 대통령을 찾아가 “퇴진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무가베 대통령은 퇴진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