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도. 조직의 편성과 직위의 상호관계, 책임·권한의 분담, 명령계통 등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 표다. 모든 조직엔 조직도가 있다. 조직 밖의 대중에게 조직도를 공개하기도 한다.
조직도를 만드는 자체는 금융회사라고 다르지 않다. 다만 한국을 대표하는 4개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KEB하나은행)의 조직도는 독특하다. 국민일보가 15일 4개 은행의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조직도를 확인한 결과 조직도 가장 상단에 ‘고객(손님)’이 있다. 이어 고객 아래에 영업점과 영업본부가 있다. 관리 기능을 주로 맡는 본점의 조직은 조직도의 중간에 위치한다. 통상 조직도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최고경영자(CEO)나 이사회, 주주 등은 맨 밑바닥에 깔려 있다.
다른 은행은 물론 일반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서 볼 수 없는 조직도다. 왜 이들은 ‘거꾸로 조직도’를 만들었을까. 수익을 가져다주는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다음으로 혈관처럼 퍼져 있는 영업점(현장)을 중요하게 여기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 은행은 ‘고객’과 ‘현장’을 왕처럼 대접하고 있을까.
‘거꾸로 조직도’의 의미
KB국민·신한·우리·KEB하나은행의 조직도처럼 고객을 정점으로 하면서 위와 아래를 뒤집은 조직도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들 은행의 경쟁자인 NH농협·씨티·SC제일은행 등의 조직도에서 ‘상석’은 이사회, 주주총회 차지다. 그 아래 은행장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국책은행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의 경우 총재와 부총재를 포함하는 금융통화위원회가 가장 위에 있다. KDB산업은행과 IBK기업은행은 이사회, 수출입은행은 은행장이 조직도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기관이라고 다르지 않다. 금융위원회는 금융위원장, 경찰청은 경찰청장이 상석에 있다. 문재인정부의 청와대 홈페이지를 보면 비서실장과 정책실장이 가장 큰 글씨로 제일 왼쪽에 놓여 있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옮기면 두 실장의 하부조직이 펼쳐진다.
4개 은행은 언제부터 거꾸로 조직도를 사용했을까.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다만 신한은행이 2013년에 가장 먼저 고객과 영업점을 상단에 올린 조직도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그랬을까. 은행 수익 창출의 핵심이 ‘고객 확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객을 강조하고, 최우선하겠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은행장들은 은행원이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자리이자 ‘꿈의 자리’라고 불리는 은행장에 오를 때마다 늘 고객을 강조한다. “주인의 마음으로 고객의 니즈(필요)를 살피고 차별화된 서비스 제공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위성호 신한은행장 취임사) “고객과 만나는 현장에서 바로 은행의 수입이 창출된다.”(함영주 KEB하나은행장 취임사) “고객과의 신뢰를 확고히 하겠다.”(이광구 우리은행장 취임사) “결국 고객이다.”(허인 KB국민은행장 내정자)
조직도에서 볼 수 없는 것
거꾸로 조직도를 쓰는 4개 시중은행은 올해 3분기까지 6조4289억원에 이르는 누적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2011년 이후 최고 성적이다. 올해 3분기까지 벌어들인 이익만으로 지난해 전체 이익을 뛰어넘었다. 핵심 수익지표인 순이자마진(NIM·자산 단위당 이익률)의 추이도 상승세다.
하지만 엄청난 실적의 이면에는 14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가 도사리고 있다. 가계가 빚을 늘리는 동안 은행들은 손쉬운 ‘이자 장사’로 돈을 벌었다는 비판도 나오는 이유다.
은행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에는 ‘수수료 장사’도 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시중은행 5곳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수수료 가운데 60%가량을 저소득층(소득 1, 2분위)이 부담하고 있다. 고소득층은 수수료를 면제받는 경우가 많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폭로한 우리은행의 채용비리 의혹 문건에 보면 ‘VIP 고객의 친인척’이라는 표기도 있다. 모든 고객이 은행 조직도의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조직도에 가려진 ‘그늘’
은행이 ‘고객은 왕’이라고 떠받들수록 그 그늘도 커진다. 고객을 위로 올릴수록 대표적 감정노동자인 은행원의 눈물은 보이지 않게 된다. 금융경제연구소가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객 대면 업무를 맡은 은행업 종사자 가운데 50.57%가 고객으로부터 욕설이나 폭언 등을 들었다고 답했다. 성희롱(3.47%)이나 신체적 접촉(5.20%)을 겪기도 했다. 실제 감정과 다르게 웃는 얼굴로 고객을 대하고 있다고 응답한 이들은 92.47%(‘약간 그렇다’ 52.15%, ‘매우 그렇다’ 40.32%)에 달했다. 힘든 감정이 퇴근 후에도 이어진다고 답한 이들도 67.39%(‘약간 그렇다’ 45.11%, ‘매우 그렇다’ 22.28%)에 이른다.
여기에다 실적을 평가하기 위한 핵심성과지표(KPI)는 비효율적인 과당경쟁을 초래하기도 한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 은행원 7만4206명(응답자 3만44명)을 상대로 설문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7%는 “고객의 이익보다 은행의 KPI 평가에 유리한 상품을 판매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은행이 업무 성과를 평가하고 인사고과에 반영하는 성과지표인 KPI는 재무(손익·공정성), 상품신규, 관리지표, 소비자 보호, 사회공헌 등의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다만 신규 상품 판매에 많은 비중을 둔다. 결국 은행원과 고객 모두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은행원에게 과로사도 남 얘기가 아니다. 한정애 민주당 의원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10년간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에서 각각 2건의 과로사가 승인됐다. 신청 건수는 각각 6건, 7건이었다. IBK기업은행(6건 신청에 5건 승인), NH농협은행(6건 신청에 3건 승인) 등 다른 시중은행도 비슷했다. 금융·보험업의 과로사 승인 건수는 건설업 다음으로 많았다. 은행원이 과도한 스트레스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