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 too)운동처럼 번질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샘·현대카드 성폭력 의혹 사건을 연달아 맡으면서 김상균 변호사는 이렇게 생각했다. 미투운동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개하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움직임이다. 김 변호사의 예상은 적중했다. 여성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에는 ‘나도 당했다’는 내용의 글이 여럿 올라왔다.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태율 사무실에서 김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성범죄가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장 내 성폭력이 연달아 폭로되는 양상은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가 의도적으로 두 사건을 모두 수임한 건 아니었다. 한샘 피해 직원 A씨(24)의 변호를 맡은 직후 주변에서 “또 다른 피해자 글이 올라왔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현대카드 사건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글을 확인하고 댓글을 남겼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현대카드 사건을 맡은 데는 준강간의 의미를 알리고자 하는 의지도 작용했다. 준강간은 형법 299조에 명시된 범죄다. 심신상실의 상태를 이용해 간음했을 때 적용된다. 현대카드 위촉계약직 직원 B씨(26)는 지난 5월 회식 후 자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팀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고, 경찰은 준강간 혐의로 해당 팀장을 조사했다. 지난달 검찰은 팀장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B씨는 무고로 역고소를 당했다.
김 변호사는 “준강간의 경우 심신상실에 대한 판단이 갈리기 때문에 (가해자가) 도덕적인 비난은 받아도 형사처벌은 받지 않을 수도 있다”며 한 판례를 언급했다. 간음행위 당시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어렴풋이 깨 피고인을 애인으로 착각한 경우 심신상실의 상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98도4355)다. 김 변호사는 “법은 피해자가 술이나 약물에 취해 아예 정신을 잃는 수준이 돼야 심신상실로 인정한다”며 “피해자에게 이 정도 수준까지 요구하는 건 가혹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준강간의 엄격한 기준이 현실과 다소 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성범죄 조사 과정에 배려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성인 피해자를 조사하는 담당자는 되도록 같은 여성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김 변호사의 생각이다. 자신도 남성이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당시 상황을 묻는 게 굉장히 조심스럽다고도 했다.
또 피해자의 고소취하 여부와 상관없이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성범죄가 비친고죄인 만큼 합의되거나 고소가 취하되더라도 법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다. 김 변호사는 “한샘 사건의 경우 CCTV 영상이 삭제됐다는 보도가 있어 경찰 기록을 요청했다”며 “신고가 빨리 이뤄졌기 때문에 CCTV가 바로 확보됐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성범죄에서는 유독 피해자와 가해자의 합의를 달리 보는 사회적 인식도 아쉬운 부분이다. 김 변호사는 “폭력 같은 범죄로 상처나 피해를 입었을 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건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성범죄) 피해자나 피해자의 부모들도 손해배상이나 합의를 두려워하는 측면이 있는데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사실 한샘·현대카드 사건은 이미 한 차례씩 결론이 났다. 한샘 사건에선 A씨의 고소취하 후 남성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준강간 혐의로 조사받았던 현대카드 사건의 팀장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변호사로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고 재판까지 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 김 변호사는 “부담이 된다”면서도 “자신이 있기 때문에 수임했다”고 답했다.
그는 “사실 돈을 벌기 위해 맡은 사건이 아니고 시간도 많이 든다”며 “그럼에도 이번 사건들을 맡으면서 나름의 열정, 정의감으로 일했던 법무관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군복무의 일환으로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공익법무관으로 3년을 보냈다. 법무관 마지막 해에는 형사사건을 주로 맡았다. 그때 성범죄 피해자나 가해자를 많이 만났던 게 성폭력 사건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됐다.
요즘 김 변호사는 한샘 사건 재고소를 결정할 수사기록을 요청해 기다리고 있다. 무고로 피소된 B씨의 변호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는 “많은 분들이 정의로운 변호사로 봐주시지만 사실 저는 합리적인 사람인데다 사명감에 불타는 성격도 아니다”며 “다만 성범죄는 신속하게 대응돼야 하는 만큼 수임료가 적더라도 많은 변호사들이 도와줄 수 있도록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임주언 기자 eon@kmib.co.kr, 사진=서영희 기자,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