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가정보원의 특수활동비를 상납한 혐의를 받는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검찰에 출석하며 국민과 국정원 직원들에게 사과했다. 앞서 같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된 박근혜정부 국정원장들이 “국정원 강화가 필요한 시점에 큰 상처를 입었다”며 ‘자가당착’ 행태를 보인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부장검사 양석조)는 이 전 원장을 13일 오전 9시30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해 박 전 대통령 측에 금품을 전달한 경위 등을 추궁하고 있다. 이 전 원장은 검찰 출석에 앞서 기자들에게 “국민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밝힌 뒤 조사실로 향했다. 그는 또 “국정원 직원들에 대해서도 이 문제로 여러 부담을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국정원 걱정’을 했지만, 국민에게 사과의 뜻을 밝히면서 어느 정도 반성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반면 이 전 원장보다 앞서 검찰에 소환된 전직 국정원장들은 국민 혈세로 배정된 특활비를 청와대에 뇌물로 제공하며 국정원의 위상을 추락시켰음에도 뻔뻔한 태도를 보여 비판받았다. 지난 10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된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우리나라의 안보정세가 나날이 위중하다. 국정원 강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라며 “그런데 최근 들어 오히려 국정원이 큰 상처를 입고 흔들리고, 약화되고 있다. 크게 걱정되고,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특활비를 청와대에 낸 게 안보 목적이냐’ ‘청와대 여론조사 비용 5억원을 왜 특활비로 냈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에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의 주장만 강변했을 뿐 의혹이 제기된 부분에는 입을 닫았다.
앞서 지난 8일 검찰에 소환된 남 전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억울하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국정원 직원들은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최고의 전사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헌신과 희생에 대해 찬사를 받지는 못할망정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은폐한 의혹을 받은 국정원 소속 변호사 정모씨와 파견검사였던 변창훈 서울고검 검사가 잇따라 자살한 것을 언급한 발언이었다. 남 전 원장 역시 이 말을 마친 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나’ ‘상납이 원장 판단이었나’ 등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한편 검찰은 박근혜정부 특활비 상납 의혹에 관여한 전직 국정원장 조사를 마무리한 뒤 상납 지시 의혹을 받는 박 전 대통령 조사 시기와 방법을 결정할 계획이다. 검찰은 박근혜정부 국정원이 2013년부터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 국가 예산인 특활비를 정기적으로 5000만원 또는 1억원씩 청와대에 상납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