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이 굉장히 밝은 편이신가 봐요.” “귀엽죠(웃음).”
이 배우의 반전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태훈(42)은 유쾌한 입담으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를테면 캐릭터에 접근할 땐 “항상 귀엽고 순수하게” 임한다고. 작품 속 그가 주로 내보였던 특유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는 영 흐릿해져 버렸다.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선’과 ‘악’이 동시에 읽힌다. 웃을 때는 한없이 다정하지만 표정을 굳히면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스친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죠. 그만큼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때로는 난감할 때도 있어요. 분명 선한 역할인데 보시는 분들이 ‘분명히 쟤가 뒤통수 칠 거야’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이런 김태훈의 강점은 영화 ‘유리정원’에서 역시 빛을 발했다. 단순히 선이나 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강렬한 내면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극 중 무명작가 지훈 역을 맡은 그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보실 수도 있지만 저는 현실에서 외면당한 사람을 그리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숲속 유리정원에서 홀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 재연(문근영)과 그를 훔쳐보며 초록 피가 흐르는 여인에 대한 소설을 쓰는 지훈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그린 영화. 신수원 감독에 대한 신뢰와 흥미를 자극하는 시나리오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지만, 지훈이라는 캐릭터에 녹아들기란 쉽지 않았다.
“연인에게 버림받고 공사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인물이잖아요. 술과 담배에 찌든 피폐함을 보여주기 위해 체중을 7㎏ 정도 찌웠어요. 안면마비를 표현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많았죠. 특히 재연에게 다가갈 때부터 파국으로 치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매 장면 어떤 감정으로 임할지 많은 고민을 했어요.”
상대역 문근영과의 호흡은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첫 만남부터 되게 느낌이 좋았어요. 제게 ‘잘생겼다’고 얘기해줘서 마음이 확 열리더라고요(웃음).” 농담으로 운을 뗀 김태훈은 “현장에서 서로 치열하게 집중했던 기억이 있다. 사석에서도 너무 즐겁게 지냈다. 촬영 끝나고 오랜만에 봐도 편하더라”고 얘기했다.
극 중 소설가로서 느끼는 창작의 고통은 실제 배우로서 느끼는 그것과 어느 정도 맞닿아있는 지점이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나 몸이나 말로 전달하는 것이나 매개체가 다를 뿐이지 그 과정은 똑같은 것 같아요. 읽고 보시는 분들에게 공감을 얻고 싶고, 서로 소통하고 싶은 거니까요.”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1997년부터 연극 무대에서 활약하던 김태훈은 2006년 ‘달려라 장미’ 주연으로 본격 영화계 입지를 다졌다. 이후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부지런히 오가며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쳤다. 특히 지난해 ‘설행, 눈길을 걷다’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를 연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김태훈은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게 연기인 것 같다”고 했다. “점점 더 욕심이 커지는 반면 만족감은 줄어드는 것 같아요. 옛날에는 ‘이 정도면 됐겠지’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게 거의 없어요. 부족한 부분만 더 크게 보이더라고요. 앞으로는 더 하겠구나 싶어요.”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매 작품마다 ‘어떻게 하면 이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고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친형인 배우 김태우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스스로 극복해야할 지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서로를 향한 응원이지 않을까 싶다는 게 김태훈의 말이다.
고단함을 견디면서도 결코 이 직업을 놓지 못한 건 ‘연기’가 지닌 매력 때문이다. 김태훈은 “연기는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내 것만 표현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다양한 배역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경험 또한 매력적”이라며 “(연기를) 잘하는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저 한 발 한 발 나아갈 뿐”이라고 말했다.
“작품 고르는 기준이 따로 있지는 않아요. 딱 읽었을 때 호기심이 생기거나 도전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작품이 있어요. 물론 결과가 매번 좋지는 않죠. 자신 없었던 작품이 주목받기도 하고, 시나리오는 편하게 읽혔지만 관객과 소통이 잘 안된 경우도 있어요. 그럼에도 전 여전히 시나리오를 읽을 때 제일 설레요. 더 다양한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연기 인생 중 터닝 포인트가 언제였느냐는 물음엔 “지금이었으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김태훈은 “요즘 심적으로 좀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다. 매번 나름의 고민이 있긴 했지만 최근에는 유독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느낌이다. ‘유리정원’을 계기로 복잡한 마음을 잘 정리하고 전환기를 맞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잖아요. 지금까지가 준비운동이었다면, 40대 초반부터는 진짜 시작인 것 같아요(웃음). 지금 저에게 욕망이 있다면, 더 연기를 잘하는 배우 그리고 더 많은 걸 포용하고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건강한 욕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