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그루밍 수법인데…' 여중생 임신 40대 무죄에 대한 비판

입력 2017-11-10 00:05
2015년 1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집중 조명한 '은별이 사건'. 대법원은 9일 이 사건에 대해 무죄 확정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여중생을 임신시킨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또 다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이 "서로 사랑한 사이였다"며 무죄 취지로 판결에 사건에 대해 검찰이 재상고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른' 가해자가 '아이' 피해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를 때 흔한 수법인 '그루밍'(Grooming)을 간과했다는 지적이 법조계와 아동청소년 보호단체를 통해 계속 일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9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연예기획사 대표 A씨(48)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심과 2심은 각각 징역 12년과 9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랑하는 연인관계’라는 피고인 주장을 받아들였다. 피해 여중생이 평소 대표에게 친밀한 표현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고 계속 만남을 이어간 것 역시 피해자가 겁을 먹지 않았다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 사건은 2015년 1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통해 '은별이 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성년자의 그루밍 성범죄 피해에 대한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이날 무죄 확정된 여중생 임신 사건이 그루밍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됐을 정도다. 대법원 판결 이틀 전인 7일 아동·청소년 보호단체인 사단법인 탁틴내일은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속 그루밍,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법조계와 성폭력 피해 전문자, 아동청소년 보로 활동가들이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대응책을 모색했다. 토론회에는 윤선영 여성·아동폭력피해중앙지원단 단장을 비롯해 배승민 가천의대 정신의학과 교수, 임수희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 등 140여명의 법조계, 아동·청소년 보호 전문가 등이 참석했다.
탁틴내일 제공


'그루밍'은 성적 유혹의 의도를 갖고 피해자에게 접근해 신뢰관계를 쌓은 뒤 피해자가 성적 가해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이는 행위로 정의된다. 가해자들은 아이들의 취미나 관심사, 외로움, 빈곤 같은 취약점을 파악해 피해자는 고른다. 이후 선물 주거나 취미를 공유하면서 친분을 쌓는 과정을 통해 아이가 가해자에게 의존하도록 길들인다.이후 가해자들은 이 관계를 성적인 관계로 이어간다. '안마하는 거다' 라거나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다'는 식의 말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후 아이가 관계를 피하려고 하면 통제를 강화하거나 협박하면서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김미랑 탁틴내일 연구소장은 "사람은 누구나 사랑과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아무에게도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는다고 믿게 된 아동은 가해자의 그루밍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매우 어렵다"면서 "오히려 피해자의 가족들까지 가해자에게 길들여져 가해자를 아이를 챙겨주는 좋은 이웃이나 어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탁틴내일이 2014년부터 올해 6월까지 접수된 성폭력 상담 사례를 분석한 결과 78건 중 그루밍에 의한 성폭력 사례가 34건(43.6%)을 차지했다. 특히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가정환경에 놓인 미성년자가 그루밍 피해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학원·학교 교사가 진로 상담을 하면서 신뢰를 쌓거나, 친아버지가 ‘다른 아빠들도 이렇게 한다’며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식이다.

탁틴내일은 수사기관과 법원도 그루밍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아 그루밍에 의한 성관계를 "피해자가 합의했다"거나 "서로 사랑한 사이"라는 식으로 판단한다고 지적했다. 

탁틴내일은 A씨 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기도 했다. 김재련 변호사(법무법인 온세상)는 “외국 판례에서는 피해아동이 느끼는 주관적 공포를 이해하는 등 피해아동의 관점을 유지하는데 반해 대법원은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에서) 피해자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았다”면서 “합리적 이성을 가진 법관 관점에서 사건을 들여다봤을 뿐 피해자의 주관적 두려움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온라인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