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의문의 1승’… 박성현에 엄지 척 세웠던 트럼프

입력 2017-11-08 17:37
박성현이 지난 7월 17일 뉴저지주 베드민스터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에서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오픈 우승컵을 들고 웃고 있다. 왼쪽 사진은 특별 관람석에서 박성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15일 전 박성현(KEB하나은행)의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US오픈 우승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성현이 가장 권위 있는 대회에서 생애 첫 투어 우승컵을 들어 올릴 때 트럼프 대통령은 현장에서 지켜봤고 엄지를 치켜세워 축하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다르게 공을 들이지 않은 ‘골프외교’는 이미 태극낭자에 의해 이뤄지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연설에서 박성현을 언급했다. 자음받침이 많은 한국식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운 듯 박성현의 이름을 한 글자씩 띄어 또박또박 말했다. 한국전쟁 휴전 64년 만에 이룩한 우리나라의 국력 상승을 정치 경제 교육 문학 음악 체육 등 여러 분야로 나눠 열거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는 “한국의 골프선수들은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췄다”며 “올해 US오픈이 미국 뉴저지의 트럼프 골프클럽에서 열렸다. 한국의 훌륭한 여성 골퍼 박성현씨가 여기서 승리했다. 세계 10위권에 있는 훌륭한 선수다. 세계 4대 골프선수가 모두 한국 출신이다. 축하한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첫 해인 올해 그의 소유지인 뉴저지주 베드민스터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은 지난 7월 17일까지 나흘간 LPAG 투어 5대 메이저대회 중 하나인 US오픈을 개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라운드부터 사흘 연속으로 이곳을 찾았다. 그는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적은 빨간 모자를 썼지만, 정작 우승은 ‘외국인’인 박성현의 몫이었다.

박성현은 최종 합계 11언더파로 아마추어 최혜진(학산여고)을 2타차로 따돌리고 정상을 밟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첫 해에,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골프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머쥔 우승이었다. 박성현은 7m짜리 버디를 잡은 15번홀부터 단독 1위로 치고 나갔다. 공교롭게 15번홀 앞에 있던 트럼프 대통령은 기립박수를 쳤다.

트럼프 대통령은 박성현의 우승 순간도 지켜봤다. 박성현이 마지막 18번홀을 떠날 때 트럼프 대통령은 승자를 자세히 보기 위해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특별 관람석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박성현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면서 엄지를 치켜세워 축하했다.

미국 일간 USA투데이는 당시 박성현의 우승 소식을 전하며 “US오픈 리더보드(순위표)는 트럼프에게 악몽”이라고 평가했다. 톱10에 진입한 미국 선수는 없었다. 가장 선전한 미국 선수는 공동 11위에 오른 알렉스 마리나였다. USA투데이의 평가는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소 불쾌한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날 트위터에 “박성현의 우승을 축하한다”고 적었다. “아마추어 선수가 몇 십 년 만에 공동 선두를 달리고 있다. 무척 흥미롭다”며 다른 한국 선수인 최혜진의 선전을 칭찬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사드 한반도 배치 지연,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론 등으로 매끄럽지 않았다. 박성현을 향한 축하인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관련해 모처럼 꺼낸 호의적 발언이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5일 사이타마현의 한 골프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라운딩하던 중 벙커에서 넘어져 뒤로 구른 모습이 현지 방송사 카메라에 포착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널리 알려진 골프 마니아다. 실력도 상당한 수준으로 전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7일까지 1박2일 일정으로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을 골프로 접대한 이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5일 사이타마현의 한 골프장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라운딩하던 중 넘어져 뒤로 구르면서까지 ‘골프외교’에 열중했다. 이 장면이 방송사 카메라에 포착돼 ‘트럼프의 조수’ ‘전략적 노예’라는 미국 언론의 조롱을 부추겼지만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성과를 높게 자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아베 총리와 다른 방식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우의를 다졌다. 골프를 통한 사교보다 경기도 평택 미군기지 깜짝 동행, 전통의 미를 살린 청와대 환영식 등으로 예우했다. 한국 여자 골퍼들은 십수 년 동안 세계 무대에서 쌓은 명성으로 문 대통령에게 예상치 못한 ‘골프외교’의 성과물을 안긴 셈이 됐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